“우리집 청소하자” 해놓고 장애인 성폭행… 무죄 왜?


한 70대 남성이 무료급식소에서 알게 된 지적장애 3급 피해자에게 5번에 걸쳐 “우리 집에 가서 청소 좀 하자”라고 말하며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됐다. 하급심에서 이 남성의 ‘장애인 준강간죄’ 판단은 유죄(1심)→무죄(2심)로 엇갈렸다. 피해자의 정신적 장애 정도가 심하지 않아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 가능 여부가 쟁점이 됐다.

대법원은 이 사건에서 정신적 장애를 지닌 성폭력 피해자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을 정도로 장애 정도가 심하지 않더라도 가해자에게 장애인 준강간죄를 적용할 수 있다는 구체적인 기준을 처음 세웠다. 다만 이번 사건에서는 피고인 남성이 피해자의 ‘항거불능 또는 곤란’ 상태를 인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며 무죄로 결론 내렸다.

엇갈린 하급심 판결… ‘항거불능·곤란’ 판단 쟁점
대법원 2부(주심 민유숙 대법관)는 성폭력처벌법 위반(장애인 준강간) 등 혐의로 기소된 A씨(81)의 상고심에서 원심의 무죄 판결을 확정했다고 23일 밝혔다.

A씨는 2018년 무료급식소에서 알게 된 40대 피해자 B씨(지적장애 3급)를 이듬해 2월 한 달 동안 다섯 차례 성폭행한 혐의를 받았다. 그는 범행 때마다 “우리 집에 가서 청소 좀 하자”는 말로 B씨를 집에 끌어들인 것으로 조사됐다.

1심은 A씨에게 성폭력처벌법 6조 4항의 장애인 준강간 혐의를 적용해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했다. 피해자가 신체적·정신적인 장애로 항거불능·항거곤란 상태에 있다는 점을 이용해 저지른 성폭행(무기징역 또는 7년 이상 징역)을 일반 성폭행(3년 이상 유기징역)보다 무겁게 처벌하는 규정이다. B씨가 항거불능·곤란 상태에 있었고,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고 본 것이다. 재판부는 피해자의 처벌불원 의사 등을 감안해 형량을 정했다.

2심은 무죄로 봤다. 1심과 달리 B씨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고 판단했다. 2심은 정신적인 장애가 ‘오랫동안 일상·사회생활에서 상당한 제약을 받을 뿐 아니라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의 정신장애’를 의미한다고 전제했다. 그러면서 “피해자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의 지적장애로 항거불능·곤란 상태에 있었다는 점이 증명되지 않았다”고 했다.

근거로는 피해자가 일반 초등학교를 졸업했다는 점과 지적장애 3급은 지능지수 50∼70으로 교육을 통한 재활이 가능하다는 점, ‘싫어하는 것’에 적극적인 거부 표현을 했다는 점 등을 들었다. 두 사람이 여러 차례 함께 식사하는 등 친분이나 호감도 있었다고 봤다.

대법 “피해 여성, 항거불능 맞아… 피고인 인식 못한 듯”
대법원 결론도 무죄였다. 그러나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은 항소심과 달랐다. 대법원은 ‘항거불능 또는 항거곤란 상태’에 대한 항소심 해석이 잘못됐다고 짚었다.

대법원은 일단 B씨가 ‘정신적 장애로 인한 항거불능·곤란 상태’에 있었고, 장애인 준강간 혐의가 적용될 수 있는 사건이라고 봤다.

대법원은 “성폭력처벌법에서 ‘신체적·정신적인 장애로 항거불능·곤란 상태에 있음’이라 함은 장애 그 자체로 항거불능·곤란 상태에 있는 경우뿐만 아니라 장애가 주원인이 돼 심리적·물리적으로 반항이 곤란한 상태에 이른 경우를 포함한다”고 판시했다. 그러면서 “피해자의 장애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인지가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항거불능·곤란 상태에 대한 판단이 성적 자기결정권 행사 여부와 무조건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라는 취지였다.

구체적으로는 피해자 B씨의 상황에 관해 한글·숫자 개념이 부족하고 대인관계와 의사소통 능력이 특히 낮다고 봤다. 대법원에 따르면 B씨는 세 번째 범행을 당한 뒤 인근 식당 주인을 찾아가 울면서 “또 가자고 하면 어떻게 하냐”고 말했다. 식당 주인이 경찰에 신고했지만, 이후에도 B씨는 A씨의 요구를 거부하지 못했다.

다만 대법원은 다른 이유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두 사람의 평소 관계를 볼 때 A씨가 B씨의 상태를 인식하지 못했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대법원은 “피고인은 이 사건 발생 1년 전부터 B씨를 만나면 심부름을 시키고 용돈이나 먹을 것을 주는 등 알고 지냈고, 집을 청소해 달라며 데려가 성폭행한 뒤 먹을 것이나 돈을 준 사실을 알 수 있다”며 “A씨로서는 B씨가 장애로 인해 항거불능·항거곤란 상태에 있었음을 인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성폭력처벌법상 정신적인 장애가 ‘성적 자기결정권을 행사하지 못할 정도의 장애’로 제한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 하급심의 혼란을 해소했다”며 “향후 유사 사건의 판단에 지침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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