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관계 빙하기 속 북한 소설 ‘벗’ 무대화 의미는?

11일까지 한양레퍼토리씨어터…극단 고래, 이해성 각색 및 연출
이혼 등 북한 주민 일상 다뤄… 이탈주민 출신 배우 김봄희 출연

극단 고래가 북한 소설 ‘벗’을 무대로 옮긴 동명 연극의 한 장면. 극단 고래

지난 2020년 말 미국 도서관 잡지 ‘라이브러리 저널’은 북한 소설 ‘벗’을 그해 최고의 세계문학 10편 가운데 하나로 선정했다. 2020년 5월 영문판이 나온 ‘벗’에 대해 저널 측은 “전체주의 체제에서 북한의 일상을 엿볼 드문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특별히 가치가 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앞서 2011년 프랑스에서 출판된 ‘벗’은 남북한을 통틀어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이기도 하다.

1988년 북한 대표작가 백남룡이 발표한 장편소설 ‘벗’은 가정법원 판사 정진우가 10년 차 부부인 예술단 가수 채순희와 공장 선반공 리석춘의 이혼 신청을 처리하는 한편 자신의 가정을 돌아보게 되는 과정을 담았다. 북한이 체제선전 혁명문학 전통을 확립한 1960년대 이후 개인의 이혼 문제를 처음 다룬 소설로 유명하다. 발표 당시 북한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2001년 드라마 ‘가정’으로 각색되기도 했다.

이해성 연출가가 이끄는 극단 고래가 지난 1일 서울 대학로 한양레퍼토리씨어터에서 북한 소설 ‘벗’을 연극으로 선보였다(~11일까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중장기창작지원사업에 선정된 극단 고래는 2022~2024년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의 뿌리를 찾고 치유와 성찰을 꾀하는 ‘고래, 혐오의 물결을 거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고, 1년 차 주제인 ‘분단 이데올로기’와 관련해 ‘벗’을 올렸다. 연극을 통해 남북한의 거리감을 좁혀보고자 2017년 발족한 남북연극교류협의회 위원장이기도 한 이해성 연출가는 2019년 낭독공연으로 진행한 ‘벗’을 보완해 정식 공연으로 만들었다.

사실 ‘벗’은 한국에서 상당히 이른 시기인 1992년 출판된 바 있다. 노태우 정부가 88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납북 및 월북 작가들 및 공산권 작가들의 작품을 해금한 데 이어 당시 한반도 해빙 분위기 속 ‘북한 바로알기운동’ 차원에서 ‘벗’ 같은 북한 작품들이 일부 소개된 것이다. 체제 찬양과 선전만 있는 줄 알았던 북한 문학에 대한 한국인들의 선입견을 깬 ‘벗’은 2018년 다시 복간될 정도로 꾸준히 읽히고 있다. 또한 ‘벗’은 극단 고래의 동명 연극을 통해 국내에서 월북 및 납북 작가들이 아닌 북한 작가의 소설이 무대화되는 첫 사례가 됐다.

극단 고래가 북한 소설 ‘벗’을 무대로 옮긴 동명 연극의 한 장면. 극단 고래

‘벗’을 보면 한국인에게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무엇보다 판사 정진우가 채순희와 리석춘의 주변 인물들을 만나 부부 사이가 악화된 원인을 찾는 한편 관계 회복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부분이다. 정진우는 채순희를 성취도가 높은 여성으로 평가하되 남편과의 옛 의리를 지킬 것을 조언하는 한편 우직하기만 한 리석춘에게는 자기 계발과 변화에 나서라고 지적한다. 판사 정진우의 이런 캐릭터는 북한이 혁명의 기본단위인 가정이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해 1956년부터 협의 이혼을 폐지하고 재판 이혼만 허용하는 것과 관련 있다. 북한은 이혼 절차가 매우 복잡한 데다 이혼 사유가 쉽게 관철되지 않는다. 이와 함께 북한에서 판사의 지위가 남한과 비교해 그다지 높지 않은 것도 한 이유다.

이해성 연출가는 “2017년 말 남북한 관계는 경색된 데다 북한의 김정은과 미국의 트럼프가 막 전쟁을 할 듯 서로 위협하는 상황이었다. 개인적으로 전쟁이 일어나면 여태까지 우리가 추구하던 민주주의, 노동자, 소수자 등의 가치가 한 방에 날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우리에게 남북 교류가 시급하다고 느꼈을 무렵 서울연극협회가 남북의 정치적 관계를 넘어 연극계 교류를 시도하기 위해 남북연극교류위원회를 만들었다. 이후 북한을 알기 위해 공부를 하고 다양한 작품들을 읽었는데,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이 여전히 북한에 대한 편견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북한 주민의 일상을 보여주는 ‘벗’을 좀 더 많은 사람과 공유하고 싶었다”며 이번 작품의 제작 배경을 밝혔다.

연극 ‘벗’은 원작 소설을 충실하게 무대에 옮겼다. 탈북민에게 북한 말씨를 배운 극단 고래 배우들의 대사 처리가 인상적이다. 그리고 반도네온 연주자 이어진의 라이브 연주와 극 중 아들 호남 역할로 등장하는 인형과 인형 조종자 등이 연극적 볼거리를 제공한다. 다만 북한이라는 것만 빼면 이야기 자체는 진부한 편이어서 중반부터 템포가 늘어지는 감이 있다. 이해성 연출가는 “‘벗’의 내용 자체가 다소 올드한 면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소설 속 말의 아름다움을 무대에 그대로 전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연극이 소설과 다른 점은 해설을 담당했던 북한이탈주민 출신 배우 김봄희 씨가 출연해 관객에게 이야기하는 마지막 부분이다. 북한 원산 출신인 김 씨는 한국에서 가정을 꾸렸다. 하지만 남북한 사람들의 인식 차이에 따른 소통의 어려움과 함께 고향을 떠났다는 정서적 상실감을 호소했다. 한국에 온 북한이탈주민이 3만 명을 넘어선 가운데 김 씨의 존재는 연극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면서 얼어붙은 지금의 남북 관계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든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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