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Q sign #5] 치료하시는 하나님, 내 몸의 흔적들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 이십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신명기 34:7)

성경이 증언하고 있지만 모든 인생이 모세 같을 수는 없을 터, 대부분의 사람은 크고 작은 질고 들을 겪으며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 내 몸이 겪은 일들은 아래와 같다.

◇ 썩은 살 – 갓난아기 때에 지네에 물렸다. 그 자리의 살이 썩어서 병원으로 데려가 뼈가 드러나도록 살을 긁어냈다고 한다. 왼쪽 옆구리의 커다란 흉터가 그 흔적이다. 그것도 세월이 흐르다 보니 지금은 겨드랑이로 기어 올라왔다.

◇ 백일해 – 유년기에 걸려서 제 나이에 학교에 입학할 수가 없었다고. 그 때문인지 바람이 좀 차다 싶으면 기침이 나곤 한다.

◇ 편도선 – 너무 심하게 부어서 죽을 뻔했다고. 집에는 늘 사람들이 붐볐다. 그 시대에 홀로 서울에 사는 집이다 보니 학교, 취업 등의 이유로 며칠은 기본이고 몇 달 혹은 몇 년까지도 친척들이 우리 집에 묵고는 했으니까. 거기 다가 우리 가족만 해도 열 명이니 집안이 늘 붐볐다. 아이들이 아프다고 해도 쉽게 파악하기는 쉽지 않았을 터.

살려고 그랬던지, 하루는 엄마가 숙제를 하는 나를 보니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하더란다. 놀란 엄마가 병원엘 데리고 갔더니, 의사 선생님 왈, “아이를 죽이려고 이 지경까지 두었어요?” 다 늙은 할미가 된 지금도,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는 뭔가를 마실 때 오른쪽 목 안에서 “딸깍”하고 열렸다 닫히는 느낌이 있다.

◇ 눈 – 국민학교 5학년 때쯤 친구네 집 앞에서 친구들과 공기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때, 웬 돌멩이가 날아와 내 왼쪽 눈을 정통으로 맞혔고 그 순간에 뭔가가 오징어 먹물이 터지듯이 눈 안에서 터졌다. 그뿐, 피도 나지 않고 아프지도 않아 그대로 놀다가 집에 돌아왔다. 그렇게 그 사건은 잊어버리고 살았다.

그 사실을 다시 기억하게 된 것은, 성년이 되어 국가 공무원 시험에 응시하고 그 결과 때문이다. 필기시험과 엄격한 신체검사를 문제없이 다 통과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불합격이 된 이유가 바로 왼쪽 눈 때문이었으니까. 나이가 먹어 가면서 몸이 피곤하게 되면 왼쪽 눈이 아주 아팠다. 심할 때는 그 아픔이 턱과 어깨까지 연장이 되고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하나님, 이 눈이 아프지 않게 해 주세요!” 내 손을 눈에 얹고 기도를 올렸다. 얼마나 그렇게 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언제부터 인가 불편함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오른편 눈과는 시력 차이가 나기는 해도 성경을 읽거나 업무를 감당 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 왼쪽 발등 – 결혼 후, 임신한 둔한 몸으로 부엌에서 일하다가 펄펄 끓는 숭늉을 그대로 왼쪽 발등에 쏟는 사고가 났다. 발 등이 짓물렀고! 힘줄까지 상했으면 어쩌나 걱정을 했지만 흉터 없이 잘 아물었다.

◇ 이빨들의 반란 – 1970년도에 결혼을 하고 71년도 8월에 큰 아이를 출산했다. 이어서 72년도에 작은 아이를 배게 되었다. 당시에 때때로 밥을 굶기도 했었다. 갑자기 왼쪽 아래의 세 번째 어금니에 견딜 수 없는 통증이 와서 그 이빨을 뺄 수밖에 없었다. 더하여, 온 이빨들이 모조리 흔들흔들한다. 웬 서른도 안 된 나이에 팥죽할멈이 되는 건가. 그냥 손으로 집어내도 될 정도. 아니, 그런데 그 이빨들이 어떻게 지금까지 다 붙어 있는지 신기하고 놀랍다.

원래, 희고 가지런한 치아를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다. 결혼하기 전에 미스 치아(Miss Dental) 후보에 거론될 정도로. 1972년도에 뽑아낸 어금니 때문에 아랫니들이 슬금슬금 벌어져서 모양새가 좀 그렇기는 하지만, 이 나이 되도록 내 원래의 치아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리고 그때 그 에미의 배 속에 있던 둘째 아이는 어땠을까.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무탈하게 자라주었고 지금껏 건강하게 잘살고 있다.
참고로, 나는 소금으로 양치를 한다. 소금에 베이킹소다와 아스피린을 부숴 넣고 그것으로 아침저녁으로 양치질을 하고 난 후에는, 짠 소금물을 코로 들이마셔서 흘려 내버리고 다시 입으로 소금물을 머금고 입안을 헹구어 낸다. 병균이 들어오는 통로를 씻어낼 뿐만 아니라 성대를 강하게 해주는 것 같다.

◇ 왼쪽 엄지손가락 – 1982년 12월 빈손으로 이민을 와서 그달로 바느질 공장에 나가게 되었다, LA에 이민을 오는 여자들은 누구나 하는 일이라고 해서. 바느질을 시도해 보려고 왼손으로 바느질감을 잡고 오른손으로 재봉틀을 만지는데, 공업용 전기 재봉틀이 순식간에 내 왼손 엄지를 박아 버리는 게 아닌가. 놀라기는 했지만, 피가 조금 나고는 별 탈 없이 아물었다.

◇ 오른손 – 미국에 이민을 왔으니 이왕이면 영어로 일을 해야 하겠다고 찾아서 들어간 미국회사. 여기서는 바느질이 아니라 옷감이 부드러워 처지는 드레스 밑단을 팽-돌아가게 잘라내는 일을 하게 되었다. 오른 손에 큰 가위를 들고, 온종일을 앉은뱅이걸음으로 드레스 밑단을 정리하는 일은 그야말로 쉽지가 않았다. 오른팔이 아프고 쑤셔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목과 등도 아주 아프기는 마찬가지다. 잠을 못 자고 끙끙대면서도, 익숙해지면 괜찮겠지 계속 일을 하다 보니 오른손등으로 뼈가 튀어나왔다. “이러다가 병신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만두고 LA 기술전문대학에 가서 Fashion design과의 Pattern making Class에 등록했다. 일주일에 세 번 Evening Class에 참석해야 되는 것을, 토요일 하루에 몰아서 하는 클래스였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돈을 벌어야 했고, 밤에 다니는 것은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3년을 공부했다.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 유명한 청바지/재킷을 만들어 내는 GUESS 회사의 Man Division에서 프로덕션 샘플 메이커로 일을 하게 되었다. 재킷 하나를 완성하려면 40~50개가 되는 조각들을 완벽하게 연결해야 한다. 안감과 겉감, 청과 가죽과 지퍼, 거의 퍼즐 맞추기다. 그렇게 아프고 쑤셨던 오른손의 통증은 가라앉았지만, 튀어나왔던 뼈의 흔적은 아직도 만져진다. <계속>

정리=

전병선 미션영상부장 junb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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