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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섬 어린이와 놀이공간]어른의 눈으로 밀고 덮고 칠하고…“우린 재미없어요”

5.‘고비용 저재미’ 제주 놀이터

제주의 한 유치원에서 어린이들이 나무 블록을 쌓거나 블록을 탁자로 삼아 소꿉장난을 하며 놀고 있다. 제주도교육청 제공

제주지역 유치원 바깥놀이공간이 점차 개선되는 것과 달리, 지자체가 관리하는 동네 놀이터는 조합놀이대가 랜드마크처럼 자리한 형태를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바닥은 콘크리트 타설 후 고무칩을 덮은 탄성포장재나, 모래를 깐 뒤 고무매트를 덮은 인공바닥재가 대부분이다. 그 위로 조합놀이대가 중심부를 차지하고, 남는 공간의 면적에 따라 흔들놀이 기구나 시소, 그네 등을 예산에 맞춰 설치했다.

이런 놀이터에는 ‘KFC’라는 별명이 붙는다. 놀이세트(Kit)와 울타리(Fence), 바닥에 깔린 고무칩(Carpet)의 머리글자를 땄다. 일률적으로 세트처럼 설치되었다는 뜻이다.

이 같은 형태는 1970년대 제주에 첫 놀이터가 생겨난 이후 크게 바뀌지 않았다. 굳이 꼽으라면 모래바닥이 인공바닥재로 바뀌고, 그네와 철봉 등이 부상 위험을 이유로 점차 사라져간 정도다. 섬유 강화플라스틱이 놀이기구의 주재료로 등극하면서 디자인과 색채가 이전보다 화려해졌다.

제주도교육청이 지난해 기적의 놀이터 사업을 추진한 제주 선흘초등학교의 모습. 도교육청은 학교 여건에 따라 자연 놀이를 강화하거나 새로운 놀이기구를 설치하도록 예산을 지원하고 있다. 제주도교육청 제공

지자체가 관리하는 제주의 한 어린이공원. 도내 142개 놀이터가 모두 인공바닥재와 조합놀이대 등 시설 위주의 형태를 하고 있다. 국민일보 자료사진

제주시 제1호 어린이공원(삼도1동 785-1)은 1986년에 조성됐다. 37년전 만들어졌지만 최근에 지어진 놀이터와 유사하다. 지자체 관리부서가 노후시설을 교체할 때 신설 형태를 기준으로 공사를 발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내 어린이공원 142곳은 판에 찍은 듯 모두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놀이터가 아이들의 놀이 욕구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구를 즐기기에는 놀이기구 수가 턱없이 적고, 아이들이 스스로 놀이를 창조할 수 있는 가변적인 재료는 거의 없다. 그래서 재미가 없다.

놀이터는 5~12세 전후 아동을 주 연령층으로 설계된다. 하지만 주변의 동네 놀이터를 지켜보면 놀이터에 상대적으로 오래 머무는 아이들은 유아 정도인 것을 알 수 있다. 초등학교 1학년만 되어도 조합놀이대를 몇 번 오르내리다 이내 싫증을 낸다.

전체적으로 아이들이 놀이터에 머무르는 시간이 짧고, 놀이터에 있더라도 놀이기구를 이용하기보다 친구들과 뛰어다니거나 대화를 나누는 등 공간을 사용하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잘 놀라고 만든 전용 놀이공간이 정작 아이들에게 인기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 아이들은 공터에서 나뭇가지 하나로도 온종일 시간가는 줄을 모르고 놀았다. 손바닥에 나뭇가지를 세우고 오래 버티기 내기를 하고, 나뭇가지 잡기, 나뭇가지 세우기, 투호놀이, 바닥에 그림 그리기, 집 짓기 등 갖가지 시합과 놀이를 고안했다. 모래, 흙, 물, 낙엽, 돌 등도 마찬가지다.

이런 자연 재료들에 비하면 놀이터의 화려한 놀이기구들은 가격은 비싸고 놀이호환성은 낮아 가성비가 떨어진다. 아이들 스스로 방법과 시간을 결정해 즐거움을 찾아가는 과정이 놀이라면, 요즘 놀이터는 이런 놀이의 기본 토대를 제공해주지 못 한다고 볼 수 있다.

전문가들은 놀이기구가 주인공인 놀이터들을 ‘지시적인 놀이터’라고 한다. 안전수칙에 맞춰 이용하도록 지시와 규칙만 있다는 의미에서다. 도전의식을 자극하기보다 순응을 유도하고, 새로운 상황에 노출되는 횟수가 적으며, 또래들과 협동할 기회도 적다.


2016년 조성된 순천시 제1호 기적의 놀이터는 기존의 비탈진 지형을 활용해 입체적인 놀이 공간을 구현했다. 국민일보 자료사진

동네 놀이터는 아이들이 놀이에 몰두할 수 있는 여건도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 그늘이 없다. 나무를 울타리 경계구역에만 심어놨으니 한여름 머리 위로 쏟아지는 뜨거운 자외선을 피할 길이 없다. 물도 없다. 놀다가 목이 마른 아이들은 물을 가져오거나 집으로 가서 마셔야 한다. 당연히 손을 씻거나 놀이에 물을 이용할 수도 없다. 벤치가 적은 곳은 부모가 아이를 그만 놀도록 채근하게 만든다. 지나치게 단조로운 놀이터, 조경 장식만 요란한 놀이터 모두 아이들에겐 아쉬운 공간이다.

최근 많은 지자체들이 큰 나무를 중심으로 놀이공간을 설계하고 있다. 놀이공간에 그늘막과 적절한 높이의 울타리, 잠시 쉬거나 가방을 올려둘 평상 등의 시설도 하나씩 갖춰가고 있다. 이는 직접적인 놀이 재료만큼이나 공간의 분위기와 여건이 놀이의 지속과 몰입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체득했기 때문이다. 제주에도 규모가 제법 큰 공원엔 수도나 의자가 충분히 설치돼 있지만, 전체 놀이터 상황을 비교할 때 미미한 수준이다.

제주의 경우 놀이터가 일부 지역에 쏠린 현상도 해결이 시급하다. 국민일보가 도내 어린이공원을 읍면동별로 구분해보니 43개 읍면동 가운데 놀이터가 있는 곳은 21곳으로 절반에 못 미쳤다. 이마저도 놀이터가 1~2개 설치된 곳을 포함해서다. 제주시는 노형동과 이도2동, 연동, 외도동 등 6개 동에 전체 놀이터(114개)의 75%가 몰려 있다.

동네 놀이터는 도시개발과정에서 도시계획시설로 결정돼 한국토지주택공사가 조성하고 지자체가 관리를 맡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개발 주체는 도시 개발 전문가이고, 관리 주체는 녹지 조성이 주 업무이다보니 놀이공간 설계에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래서 아이들의 놀 권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증가해도 동네 놀이터엔 변화가 없다.

전문가들은 “놀이공간은 화려한 색과 디자인으로 어른들의 눈을 사로잡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다양한 놀이욕구를 채울 수 있는 기능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또 “놀이터를 만들 때에는 ‘아이들이 괜찮은 어른으로 크는 데 도움이 될 만한 경험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라는 물음을 먼저 가져야 한다”고 조언한다. 디자인 자체보다 놀이터가 아이들의 놀이를 어떻게 뒷받침할 것인지 기능을 먼저 생각하자는 의미다.

제주=문정임 기자 moon1125@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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