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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자 비긴즈[EP3] 유튜브의 ‘킹덤’에서 ‘글로리’를 발견하다

‘천하무적’ 교역자의 삶, 내려놓으니 공허함 가득
정죄했던 유튜브, OTT 세계에서 성도들의 삶 발견



‘신동엽의 뇌구조 3등분하면 여자, 암컷, 교미’ ‘노사연 뇌구조에서 이무송은 콩알만 한 점’.
예능 프로그램에 나온 뇌구조 사진에 폭소를 뿜어내던 때가 있었다. 부교역자의 뇌구조는 어떨까. 모르긴 몰라도 교회와 사역이 8할을 채우고도 남을 거다.

한 번은 ‘사역자의 삶’을 다룬 유튜브 콘텐츠를 보다 화면 속으로 영혼이 빨려 들어가는 경험을 했다. 영상에서 부교역자는 부서를 맡아 인도하는 찬양인도자 겸 설교자로, 평일에는 영상 편집자로, 예배가 있는 날은 주차 봉사자로, 예배가 시작되면 음향 간사로, 예배가 끝나면 환경미화원으로, 모든 일정이 끝나면 교회 문단속 하는 집사로 살아가고 있었다. 하이라이트는 이 모든 일정의 끝자락에서 새벽기도로 리셋(reset) 된다는 것이다. 실소가 나오는 웃픈(웃기고도 슬픈) 현실이었다.

영상 속 교역자는 천하무적이어야 하고 무엇이든지 잘해야 했다. 아파도 안 된다. 사고가 나도 쉬기 어렵다. 밥 중에 제일 맛 없다는 눈칫밥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서서히 소진되어 갔고 그게 최선이라는 사명감에 불타오르는 것이 부교역자였다. 풍자가 웃기면서도 슬픈 이유는 명확하다. 지극히 현실적인 지점을 뼈 때리듯 강타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모든 부교역자가 그러하진 않다.

영상 속 모습의 일부가 투영된 나에게 뇌구조의 8할에 해당하는 부분이 어느 날 텅 비었다. 부교역자 역할과 ‘헤어질 결심’을 하고 사임 후의 일상을 맞게 되면서부터다. 새로운 일상은 아빠 재킷을 걸쳐 입은 아이 마냥 어색했다. 눈 뜨자마자 눈 감고도 갈 수 있었던 곳으로의 발길이 끊겼다. 사역과 관련된 수많은 단톡방도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개인적인 연락, 친분이 두터운 전도사님, 목사님으로 구성된 단톡방 외에는 내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사라졌다. 아니 없었다.

밀려오는 외로움은 상상 이상으로 깊었다. 깊은 외로움은 상상도 못했던 부작용을 가져왔다. 쉬지 않고 울리던 카톡 알림 소리가 그리웠다. 채울 칸 없이 빼곡했던 스마트폰 스케줄 화면이 그리웠다. 바빴던 시간을 감사하지 못했던 게 한없이 죄송했다. 일상의 상실이 생각보다 컸다.

외로운 마음을 달래보려고 외출을 하자니 지출에 대한 걱정이 가슴을 짓눌렀다. 가벼워진 주머니를 확인하곤 마음을 접었다. 집에 있으면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었다. 무엇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거실에 앉아 멍하니 천장을 바라봤다. 그러나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우리 가정에 도움이 되는 일이 뭘까?’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그래. 매일은 어렵겠지만 아내와 딸을 위해 식사 한 끼를 차려보자.’ 눈이 번쩍 뜨였다. 몇 초 만에 절망에 빠졌다. 할 줄 아는 요리가 없었다. 여기서 멈출 순 없었다. 가족에게 만들어 주고 싶은 요리를 인터넷 검색창에 넣었다. ‘이럴 수가!’ 그곳엔 ‘레시피(recipe)’란 이름의 수많은 복음들이 있었다.

준비해야 할 재료와 도구, 계량하는 법, 맛깔나는 조리법과 남은 재료로 다른 요리를 만드는 법까지. 그야말로 요알못(요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 불과했던 한 인간이 구원의 손길을 만난 듯 했다. ‘요리의 킥’으로 불리는 참치액과 치킨스톡 그리고 시크릿코인은 삼위일체로 느껴질 정도였다. 이것만 있으면 모든 요리가 가능했다. 각종 스프를 만들고 스파게티에 도전하고 들기름 막국수를 선보이며 가정에서 전에 없었던 내 자리를 찾아갔다. 행복했다.

블로그와 유튜브 묵상은 매일 빼놓지 않았던 말씀 묵상처럼 일상의 루틴이 됐다. 묵상은 점점 확장됐고 정주행은 계속됐다. 빠니보틀, 곽튜브, 모칠레로 등은 여행지로의 순례를 도와줬다. 영화나 시리즈 드라마를 족집게 강사처럼 설명해주는 설명가, 웃다가 울 수 있음을 알려준 개그 콘텐츠 등이 알고리즘을 타고 쉴새 없이 초대장을 보냈다.

온라인 세계에 머물며 되짚어보니 성도들의 삶은 이곳에 있었다. 그런데 목양의 울타리에서 나는 이곳을 묵상하지 말라고 선언했다. 빠져 있지 말라고 가르쳤다. 큰일 난다고 했고 삶 속에서 성스러움과 속됨을 구분했다. 이분법적으로 성도들을 양성했고 정결한 삶만을 말했다. 이것을 승리라고 규정하며 함께 기도하자고 했다. 하지만 그 안에도 크리스천으로서 얻을 수 있는 깨우침이 분명히 있었다.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것이 멈추어 버린 교회도 콘텐츠화 됐고 예배도 유튜브로 드렸다. 헌금을 온라인으로 하는 시대가 열렸고, 헌금 어플도 생겨났다. 헌금 최고액이 600만원이라서 도입을 주저했다는 교회의 이야기를 듣고 600만원 이상을 헌금하는 사람이 있음에 놀랐다. 모일 수 없는 상황에 화상회의 어플 줌(Zoom)으로 회의, 셀모임, 기도회도 했다. 이 모든 모습들이 일상이 되었다. 과거에는 부정하다고 치부했던, 상상조차 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예배를 드렸다. 성과 속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우리의 삶이 속된 것일까. 유튜브가 잘못된 것일까. 게임이 나쁜 것일까. 넷플릭스를 비롯한 각종 OTT 서비스는 죄인가. 아니었다.

유튜버들은 돈이 될 만한 것들을 누구보다 빨리 알았다. 그들은 사람의 마음을 잡으려고 노력했고 ‘원하는 것을 알려주면 된다’를 사명으로 생각하며 무모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거기에 우리는 열광했고 ‘좋구알(좋아요 구독 알림설정)’을 실천했다. 나는 성도들의 삶을 알아가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 나는 무모한 열정이라도 있었나 생각해 봤다. 교회라는 틀 안에서 고체화되어 버렸고 시대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보지 못했다.

‘작은 가게에서 진심을 배우다’라는 책은 이렇게 말한다. 설렘(장사는 손님이 오기 전부터 시작이 된다) 맞이(화려한 서비스보다 마음 다한 진심으로) 사이(손님과 주인의 관계가 사이가 될 때) 정성(음식은 사람에게서 나온다) 여운(다시 찾게 되는 가게의 매력). 음식을 판매하는 분의 진심이 느껴진다.

유튜브 영상을 만드는 유튜버들의 고민이 보인다.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것들 필요로 하는 것들 대부분이 이 안에 있다. 교회를 좋아요, 구독, 알림설정 해놓는가. 스타벅스 앞에서 굿즈가 나올 때 밤 지새워가며 기다리듯이 새벽기도를 위해 그 전날부터 잠을 설치는가. 예수를 만나게 하기 위해 나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나.

유튜브를 통해 배우기 시작했다. 비대면 여행을 통해 얻게 되는 유익처럼 말씀을 통해 얻게 되는 유익을 삶에서 찾으려는 노력을 하지 못했다. 짧은 영상을 통해 말씀의 길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고 쇼츠를 통해 더 짧고 임팩트 있는 외침이 요구되는 빠른 사회를 발견했다. 선한 영향력에 박수 치는 사람들의 미소를 보았고 환영, 선대, 환대라는 키워드를 찾았다.

유튜버들은 자유롭고 자연스레 합방을 했다. 여행을 함께 다니고 함께 먹고 뛰고 서로의 지식을 공유하며 조화를 꾀한다. 같은 상황을 공유하면서도 각자의 카메라로 비슷한 듯 다른 콘텐츠를 생산한다. 그렇게 서로 밀고 당기며 캐릭터를 구축하고 세계관을 확장해간다. 그에 비하면 교회가 서로를 서로를 너무 내외하지 않았는지 떠올려 본다. 미디어 콘텐츠로의 묵상은 이어져 갈 것이다. 그 세계에서의 복음을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으로 바꿀 수 있는 법을 찾기 위해서다. 물이 포도주로 바뀔 만큼의 기적이 이 광야에서 언제 펼쳐질지 모른다. (Y will be back!)




최기영 기자 일러스트=이영은 ky710@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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