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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윤상의 세상만사] 김옥균과 친일파의 결말


요즘 정부가 강하게 드라이브를 걸고 있는 일본과의 관계개선 작업으로 인하여 친일파 논쟁이 거세다. 혹자는 굴욕적인 매국행위라고 하고, 혹자는 미래를 위한 과감한 결단이라고 한다. 이 지점에서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김옥균은 명문 양반가, 소위 금수저 출신으로 과거에 장원급제할 정도로 재주가 출중했다. 조선이 위기에 처하자 그는 개화사상에 동화되어 박영효, 서재필 등과 비밀결사를 결성하고 신사유람단을 조직하여 근대화된 일본 구석구석을 탐방하면서 조선 개화의 길에 대해 고민했다. 이후 그는 수신사가 되어 일본을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일본은 그를 친일파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노력 때문인지 김옥균은 일본을 신뢰했던 것으로 보인다.

1884년 10월 17일, 우정총국(근대적 우편 업무를 담당하던 기관) 준공식이 열리던 날을 정변 D-day로 정한 김옥균은 미리 거사를 상의해온 일본 공사관에게 군대를 준비해 달라고 부탁하고, 서재필에게도 병력을 동원해 줄 것을 주문했다. 당일 축하파티가 무르익을 무렵, 개화파가 북쪽 건물에 불을 내 참석자들이 건물 밖으로 피신하기 시작하자, 개화파 군인들이 피신하던 수구파들을 처단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김옥균은 궁으로 달려가 고종과 민비를 경우궁으로 옮기고 궁 주변에 일본군을 배치해 경비하게 했다. 그리고 왕명으로 입궐한 척사파와 수구파를 척결하는 한편, 14개조의 개혁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민비의 요청으로 출동한 청나라군에 수적으로 열세에 놓인 일본군이 처음 약속과 달리 철수하면서 갑신정변은 삼일천하로 막을 내렸다. 김옥균으로서는 믿었던 도끼에 발등 찍힌 셈이다.

정변에 실패한 김옥균은 박영효 등과 함께 일본 공사관으로 도주해서 일본인으로 변장하고 일본군의 호위를 받아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 후, 일본 고위층과 접촉하며 일본군의 도움을 받아 조선으로 쳐들어가서 정권을 전복하려고 노력은 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김옥균을 찬밥 취급하는 바람에 모두 무산되었다. 이에 김옥균은 청나라 실세인 이홍장을 만나 담판을 짓기 위해 상하이로 갔으나, 고종과 민비가 보낸 자객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비참하게 암살된 김옥균은 한양으로 보내져 능지처참 된 뒤, 머리는 효수되고 가리가리 찢긴 몸은 전국을 돌려 전시되었다. 비극은 김옥균 하나에 그치지 않았고, 온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생모와 누이는 음독 자결했고, 생부는 투옥된 후 처형되었으며, 동생은 옥사했다. 부인만이 간신히 관군을 피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일본이 호시탐탐 조선을 집어삼키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하지 못한 김옥균의 오판에서 비롯된 갑신정변의 결과로 톈진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일본은 청과 동등하게 조선에 파병할 수 있는 권리를 얻게 되었고, 이를 발판삼아 기어이 조선을 통째로 먹었다.

우리는 일제 패망 이후 친일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 결과, 일본은 여전히 일제강점기 한민족에게 저지른 범죄를 합리화 또는 정당화하고 있고, 보수 정권의 호위를 받으며 오랫동안 한국에서 기득권자로 군림해온 친일파와 그 후손들도 이에 동조하고 있다. 심지어 김영환 충북지사는 ‘기꺼이 친일파가 되련다’라며 공개적으로 커밍아웃까지 할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가 일본에 짝사랑 러브콜을 보냈으니, 어쩌겠는가, 우리네 장삼이사들은 윤석열 정부의 판단이 부디 김옥균의 오판이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

*외부 필자의 기고 및 칼럼은 국민일보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엄윤상(법무법인 드림)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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