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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오페라단, 신작 ‘일 트로바토레’ 관람 연령 올린 이유는?

잔인한 묘사와 폭력적 장면 포함… 8세 이상에서 14세 이상으로 상향
레지테아터 유행… 작품 의도를 극단적으로 표현해 관객의 시선 모아

잔카를로 델 모나코가 연출을 맡은 국립오페라단의 신작 ‘일 트로바토레’의 무대 스케치. 원래 15세기 초 스페인이 배경이지만 델 모나코는 범죄가 만연한 현대 미국의 도시로 작품 배경을 설정했다. 국립오페라단

국립오페라단은 최근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SNS) 계정을 통해 신작 ‘일 트로바토레’(6월 22~25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의 관람 연령을 기존의 8세 이상에서 14세 이상으로 상향했다고 공지했다. 국내에서 일반적인 오페라 관람 연령은 취학 연령인 8세 이상인데, 공연에 잔인한 묘사와 폭력적인 장면이 포함돼 있다는 이유로 개막을 3주 앞두고 급하게 바꾼 것이다.

‘일 트로바토레’는 ‘라 트라비아타’ ‘리골레토’와 함께 이탈리아 오페라의 거장 베르디의 중기 3대 작품으로 꼽힌다. 중세 음유시인이란 뜻의 ‘일 트로바토레’는 15세기 초 스페인을 배경으로 어린 시절 헤어진 형제인 루나 백작과 음유시인 만리코의 피 튀기는 대결과 함께 집시 어머니의 복수를 하는 아주체나의 처절한 복수극으로 유명하다. 이 작품을 잘 모르는 관객도 ‘대장간의 합창’ 등 아리아를 들으면 바로 고개를 끄덕일 정도다.

이번에 국립오페라단이 ‘일 트로바토레’의 관람 연령을 올린 것은 연출가 잔카를로 델 모나코가 원작의 시·공간을 충실히 재현한 전통적 무대 대신 범죄가 만연한 현대 미국의 도시로 배경을 바꾼 데서 비롯됐다. 루나 백작과 만리코의 대결은 백인 우월주의 조직과 다인종 이민자 집단 사이의 대결로 그려진다. 또 갱 조직이 등장하는 만큼 마약, 폭력, 살인 등 자극적인 장면들도 나온다. 지난해 델 모나코가 국립오페라단에서 연출한 ‘아틸라’의 경우 한국 초연이었던 만큼 전통적인 스타일을 따랐지만 ‘일 트로바토레’의 경우 한국에서도 여러 차례 공연된 만큼 이번에 원작을 파격적으로 재해석한 ‘레지테아터(Regietheater)’ 스타일을 채택한 것이다.

이탈리아 출신의 오페라 연출가 잔카를로 델 모나코. 국립오페라단

독일 연출가 막스 라인하르트가 1930년대 창안한 레지테아터는 연출가가 희곡에 쓰인 대로 재현하는 대신 새롭게 해석해 무대에 올린다. 조명, 음악, 음향 등 시청각적 요소를 활용해 연극성을 강화한 라인하르트의 연출은 관객을 사로잡았다. 당시 “원작에 충실해야 한다”며 레지테아터에 반발하는 목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연극계에서는 점차 일반화됐다.

오늘날 레지테아터 연출은 연극보다 오페라에서 자주 화제가 된다. 보수적인 오페라계에서 뒤늦게 받아들이면서 종종 논란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오페라계에서 첫 레지테아터 연출은 1976년 바그너 오페라 팬들의 성지인 독일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의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이다. 프랑스 연출가 파트리스 셰로는 신과 영웅들이 등장하는 원작의 신화 세계를 현대 도시의 변두리로 옮겨놓았다. 원작의 테마인 사랑과 권력을 현대인의 문제로 제시한 것이다. 셰로가 연출한 ‘니벨룽의 반지’는 오페라 역사에 한 획을 그으며 레지테아터 오페라의 출발점이 됐다. 그리고 레지테아터 오페라는 1982년 잉글리시 내셔널 오페라에서 조나단 밀러가 연출한 ‘리골레토’의 폭발적인 인기로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 됐다. 원작의 배경인 중세 시대 만토바 궁정을 1950년대 뉴욕 마피아들의 술집으로 바꾼 ‘리골레토’는 관객이 작품을 친근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들었다.

국립오페라단이 2017년 선보인 ‘리골레토’는 선정성을 이유로 관람 연령을 14세(중학생) 이상으로 정했다. 국립오페라단

레지테아터 오페라의 유행은 ‘연출가 시대’로 불리는 현대 오페라계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무엇보다 노출과 폭력성이 증가했는데, 작품의 의도를 극단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관객의 시선을 끄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원작과 다른 이야기를 새롭게 만들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레지테아터 오페라의 대표 연출가 중 한 명인 페터 콘비츠니는 “많은 사람이 작품 초연 당시의 모습으로 재현하는 것이 ‘원작에 대한 충실함’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다. 초연 당시로부터 컨텍스트(맥락)가 변화했기 때문이다. 연출가의 역할은 원작과 관객의 중개자로서 작품에 내재하는 메시지를 현대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이것이야말로 원작에 대한 충실함이다”고 주장한 바 있다.

레지테아터 오페라는 성악가의 캐스팅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과거엔 가창력이 절대적 요소였지만 이제는 외모와 연기력도 중요한 요소로 꼽힌다. 실제로 해외에선 성악가들이 속옷 차림 또는 누드로 출연하는가 하면 폭력 액션을 직접 소화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다만 한국 오페라계는 보수적인 편이어서 유럽처럼 19금의 과격한 레지테아터는 나오지 않는다. 역대 국립오페라단의 작품 가운데 이번 ‘일 트로바토레’처럼 관람 연령을 14세(중학생) 이상으로 정한 것은 2016년 ‘루살카’, 2017년 ‘리골레토’, 2019년 ‘마하고니 도시의 번영과 몰락’ 등 손에 꼽을 정도인데, 유럽과 비교하면 선정성과 폭력성이 높다고 말하기도 민망할 정도다.

장지영 선임기자 jyja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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