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아니야”… 죽음 부르는 갑질, 우리가 바로 문제다 [이슈&탐사]



직역을 가리지 않고 터져 나오는 갑질에 대한 아우성은 사회 구성원의 상식 부족 때문인 것이 아니다. 감정노동자를 존중하고 배려해야 한다든지, 대가를 지불하고 서비스를 제공받는다 해도 기본적으로 평등한 사람 대 사람의 관계라든지 하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다. 갑질이 근절되지 않는 근본적인 이유는 오히려 스스로를 돌아보는 대신 “나는 아니다”며 남 일로 치부하는 안일한 인식에 있다.

국민일보는 엘림넷 나우앤서베이에 의뢰해 20대~60대 이상 성인 537명을 상대로 갑질과 감정노동에 대한 경험을 조사했다. 25일 조사 결과를 보면 한국사회는 ‘갑질을 당했다는 이는 많은데, 정작 갑질을 했다는 이는 없는’ 상태다. ‘일할 때 갑질을 당하고 감정을 숨긴 경험’을 묻자 57.0%가 보통 이상의 수준으로 그러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 그런데 반대로 ‘감정노동자에게 갑질을 해본 경험’을 물었을 때에는 20.7%만 그와 같은 경험이 있다고 했다.


“갑질을 했다”는 사람이 “갑질을 당했다”는 사람의 3분의 1에 불과하다는 조사 결과에는 갑질과 감정노동이 지속되는 원인이 숨어 있다. 각자가 타인에게는 가혹하지만 스스로의 행위에는 관대하다는 점이다. 특정 소수가 다수를 상대로 무분별한 갑질을 거듭한다고 해석할 여지도 있지만, 이러한 해석은 감정노동자들이 말하는 실태와 맞지 않다. 국민일보의 ‘갑질-감정노동 실태조사’에 응한 감정노동자들은 직역을 불문하고 “과거보다 개인주의가 커졌다”는 명제에 크게 동의하고 있다.

한국사회 구성원은 ‘손님은 왕’이라는 말이 광고의 구호일 뿐이며, 아무리 돈을 지불했다 하더라도 사회적 관계가 평등해야 한다는 점을 이미 잘 알고 있다. “고객과 감정노동자의 관계는 어때야 옳은가”를 물었을 때, “평등해야 한다”는 응답은 89.6%였다. “(돈을 지불한)고객이 노동자의 우위에 있어야 옳다”는 응답은 5.6%에 불과했다. 사회 구성원의 이론적 인식은 감정노동자들이 현장에서 폭언으로 겪어온 실증적 경험과 배치된다. 경비노동자들의 경우 “내가 관리비를 내기 때문에 너는 노예”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었
다.

갑질을 안하면 손해라는 비뚤어진 인식을 형성한 또다른 축은 사업장 관리자의 미온적인 대응이다. ‘갑질과 감정노동의 문제에서 책임이 가장 큰 주체’를 물었을 때, ‘악성민원에 대처하지 않는 관리자’라는 응답이 43.3%로 ‘악성민원 제기 소비자(43.6%)’와 거의 동일한 비중을 차지했다. 거대 기업은 감정노동을 외주화하는 방식으로 책임을 덜고, 관리자들은 고통의 원인을 노동자에게서만 찾는다. 이정훈 서울시 감정노동 종사자 권리보호센터 소장은 “알고 있는 지식과 실제의 행위가 이율배반적인 경우가 많다”며 “사람에 대한 자세, 노동에 대한 관점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설문조사는 지난 21일부터 22일까지 전국 20세 이상 남성 283명, 여성 254명 총 537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표본에는 20대부터 60대 이상까지 연령대별로 각 100명 이상이 고르게 포함됐다.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오차범위 ±4.23% 포인트다.


이슈&탐사팀 이택현 정진영 김지훈 이경원 기자 alley@kmib.co.kr

이택현 기자 alley@kmib.co.kr
정진영 기자 young@kmib.co.kr
김지훈 기자 germany@kmib.co.kr
이경원 기자 neosar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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