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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엔 더 잘하겠다”던 2018년 자카르타의 약속, 5년 만에 지켜냈다

한국은 28일(한국시간) 중국 항저우 e스포츠 센터에서 열린 항저우 아시안게임 e스포츠 ‘리그 오브 레전드’ 종목 4강전에서 중국을 2대 0으로 꺾고 결승으로 향했다. 경기에 집중하고 있는 ‘룰러’ 박재혁의 모습. 공동 취재단

“폐만 끼치고 가는 것 같아 미안하고…다음엔 더 잘하고 싶습니다.”

e스포츠 ‘리그 오브 레전드’ 국가대표 ‘룰러’ 박재혁은 2018년 8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의 한 농구 경기장에서, 은메달을 목에 걸고 시상대를 내려온 직후부터 쥐똥같은 눈물을 흘리며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5년 뒤, 그를 울렸던 상대의 나라에서 복수에 성공했다.

박재혁이 속한 한국 e스포츠 리그 오브 레전드 대표팀은 28일(한국시간) 중국 항저우 e스포츠 센터에서 열린 항저우 아시안게임 4강전에서 중국을 2대 0으로 꺾었다. 이날 승리로 29일 열리는 대회 결승전 진출을 확정, 금메달에 한걸음 더 다가섰다.

박재혁으로선 이번 경기 결과가 유달리 남다르게 다가온다. 그는 리그 오브 레전드와 e스포츠가 시범 종목으로 편입됐던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당시 결승전에서 중국의 전설적인 프로게이머 ‘우지’ 젠 쯔하오에게 완벽하게 가로막혔다.

경기 후 진행된 믹스트존과 기자실 인터뷰 내내 그는 죄 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리고 “민폐만 끼쳐서 죄송하다. 다음엔 더 잘하고 싶다”며 흐느꼈다. 당시 협회 관계자에 따르면 박재혁은 경기 후 시상대에서, 믹스트존에서, 숙소로 가는 차 안에서 울었다.

그로부터 5년이 지났다. 2023년 9월 28일, 박재혁은 자신을 울렸던 중국의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시원하게 한풀이를 해냈다. 1세트에선 카이사, 2세트에선 제리로 맞수 ‘엘크’ 자오 자하오를 압도하면서 자신을 울렸던 나라는 3·4위 결정전으로, 5년 동안 미안했던 나라는 결승전으로 보냈다.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당시 중국과의 결승전에서 패배한 뒤 침통한 표정으로 기자실 인터뷰 중인 ‘룰러’ 박재혁. 쿠키뉴스 DB

5년 사이 박재혁에겐 많은 일이 있었다. 그는 2019년에 프로게이머 인생 최대 위기 슬럼프를 맞았다. 팬들의 눈물을 보고 마음을 다잡았다던 그는 이듬해인 2020년부터 같은 포지션에선 국내에 적수가 없다는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2022년 고향과도 같았던 ‘원 클럽’ 젠지를 떠났고, 올해 중국에서 전 세계 모든 원거리 딜러를 자신 앞에서 무릎 꿇게 했다.

리그 오브 레전드 종목에서 한국과 중국은 양대 산맥으로 꼽혀서 라이벌 의식이 대단하다. 한국은 중국전 준비에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았다. 선수들은 프로 리그 최고 권위 대회인 ‘월드 챔피언십’ 준비도 제쳐놓고 대표팀 합숙에 참여했고, 와서도 잠자는 시간까지 줄여가면서 연습에만 몰두했다. 박재혁 역시 5년 전을 설욕하고자 칼을 갈았다. 그 결실을 이날 맺었다.

박재혁은 중국전 후 믹스트존 인터뷰에서 “5년 전의 아쉬움을 보상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더 성장했다고 느껴서 마음 한쪽이 뭉클해진다”고 말했다. 그는 “2018년에 지고 배운 게 많았다. 선수로서의 마음가짐, 국가대표로서의 마음가짐, 책임감을 배웠다”고 전했다. 그는 29일 대만 또는 베트남 상대로 5년 묵은 마지막 눈물 자국을 닦으러 나선다.

항저우=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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