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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교육 선구자, 아펜젤러] (6) 배재학당의 정초석

학생 수 폭발적 증가, 서양식 학교건물 신축

[한국 근대교육 선구자, 아펜젤러] (6) 배재학당의 정초석 기사의 사진
배재학당의 초기 학생들 모습. 배재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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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펜젤러는 교육 선교 초기에 의미 있는 일을 경험한다. 우선 왕에게 배재학당이라는 이름과 현판을 하사 받은 것이고 둘째는 배재학당의 건물을 서구식으로 지은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신앙을 갖게 된 학생들이 생겨 정동교회의 효시가 되었다는 점이다.



배재학당 현판의 의미

아펜젤러는 그의 일기에 고종이 1887년 2월 21일 현판을 하사했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배재학당이란 이름은 고종과 조병식이 지었다. 조병식은 예조와 형조판서를 지낸 사람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조병식은 이후 배재학당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독립협회에 왕정을 전복시킨다는 누명을 씌워 탄압한 인물이다.

당시 아펜젤러는 이러한 조선 정부의 승인을 정부 차원의 보호로 생각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더 이상 학생들은 핍박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 없이 학교를 다닐 수 있다. 현판이 걸려있는 학교 정문은 우리의 교육 선교를 조용히 보호해준다. 더 이상 선교사라는 신분을 감출 필요도 없다. 이 현판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培材學堂)’이란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자세히 알기 원했다. 그는 조선에서 처음 세례를 주었던 일본영사 직원 하야카와(早川)에게 한문의 의미를 부탁하였다. 하야카와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정동 거류지에 있던 판사 유키가 다음과 같이 해석을 하였습니다. 이름의 첫 번째, 한자인 배(培)자는 경작물을 얻기 위해 주변의 흙을 일구는 것으로, 뜻을 보면 양육하다(to rear)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두 번째 한자인 재(材)는 집을 지을 때 쓰는 재료로써 뜻을 보면 집을 지을 때 좋은 재목을 사용하듯 ‘정부조직 가운데 좋은 인재’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어 유키 판사는 자신의 관점으로 바라볼 때 조선 정부가 당신의 학교에 유능한 인재를 양육하는 것을 기대한다는 의미라고 하였습니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의 의미를 일기에 적어두었고 그 아래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다. “내가 희망하는 것은 조선을 위해 유용한 인물이 될 뿐 아니라 조선의 백성을 위해 필요한 인재가 되도록 할 것이다.” 아펜젤러의 이러한 사명은 그의 생명이 다 할 때까지 지속됐다. 조선 정부뿐 아니라 조선의 백성을 위해 인재 육성을 목표로 했던 배재학당은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이승만을 위시해 서재필, 주시경, 나도향, 김소월 등을 배출하여 ‘배재’를 실현시켰다.



배재학당의 정초석

1885년 6월부터 시작된 교육 선교는 이듬해 10월에 이르자 학생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인원이 너무 많아 한옥식 교실에서는 수용이 어려워 새로운 건물이 필요했다. 아펜젤러는 1887년 1월 3일 선교본부의 리드 감독에게 새로운 건물이 필요성을 주장했고 그해 5월 선교본부로부터 편지가 도착했다. 내용은 학교 건축에 대한 허가와 후원이 이루어졌음을 알리는 기쁜 소식이 있었다.

이후엔 학교 건축이 천천히 진행됐다. 아펜젤러의 일기나 문서를 보면 이 건물에 대해 ‘대학당(college hall)’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아펜젤러는 교육 선교 시작부터 대학으로 발전시키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1898년 아펜젤러는 선교의 후반부에 배재학당을 ‘서울대학교(Seoul University)’로 발전시키려 했었다. 그러나 감리교 선교본부, 동료 선교사와의 의견 충돌로 보류했다.

배재학당 건물은 서양식 건물로 빨강색 벽돌을 이용하여 지었다. 76×52피트(368.3㎡)의 규모로 진행했다. 정초석(모퉁이 돌)을 쌓아 올릴 무렵 아펜젤러는 1887년 8월 5일 오후 4시45분에 스크랜튼 어머니, 하야카와 씨, 요시자와 씨와 함께 정초식을 거행하였고 정초석 안에는 박스 형태로 의미 있는 물건을 담았다. 일종의 타임캡슐과 같은 상자에는 당시 통영 되었던 현금과 일본 은화 1닢, 마가복음, 선교잡지 3종(1887년 6월 출간 ‘Gospel in all land’, ‘Heathen Woman’s Friend’, ‘Christian Advocate’), 배재학당 약사, 메모, 선교본부로부터 건축 허가를 받아낸 리드 감독의 서한을 담았다.



배재학당을 통한 복음화

배재학당이 근대 교육의 중심에 있었지만 학교 내 선교는 자유롭지 못했다. 국립학교에서 왔던 학생 한 명은 “하나님께서 비(rain)를 내리신다”는 영어문장을 읽지 않고 거부했다. 이에 아펜젤러는 보다 신중하게 선교에 접근하면서 하나님께 선교의 문을 열어 달라고 기도했다.

이러한 그의 간절한 기도가 이루어졌는지 한용경이라는 학생은 아펜젤러를 한밤중에 몰래 찾아와 신앙에 대해 상담을 하였다. 1887년 7월 24일에는 박상중이라는 학생이 세례를 받게 된다. 박상중은 유능한 자원으로 하야카와 씨가 세례를 권고했다.

이후 아펜젤러를 제일 먼저 찾아왔던 한용경은 고민 끝에 10월 2일 두 번째로 세례를 받게 된다. 이를 계기로 1887년 10월 9일 오후 남대문 부근에 성경사업과 반포를 위해 마련했던 한옥의 벧엘 예배당(Bethel Chapell)에서 한국인과 정식으로 첫 예배를 드린다. 이것이 한국감리교회의 모 교회 정동제일교회의 시작이다.

소요한 명지대 객원교수·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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