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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교육 선구자, 아펜젤러] (7) 배재학당과 한국 선교

“신자 100명·학생 30여명… 복음의 놀라운 승리”

[한국 근대교육 선구자, 아펜젤러] (7) 배재학당과 한국 선교 기사의 사진
스크랜톤 대부인이 선교의 일환으로 세운 이화학당 초기의 모습. 배제학당 역사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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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 외국인과 현지인 선교

조선 정부는 현지인을 상대로 직접 선교를 금지했다. 그러나 주한 외국인들의 종교 활동은 허가했다. 아펜젤러는 그의 선교 초기였던 1885년 8월∼1887년 1월, 미국인 연합교회와 일본인 구락부를 중심으로 예배와 설교, 전도 등 목회 활동을 활발히 수행했다. 미국 북감리교 선교부의 1886년 연례보고서를 보면 서두에서 시작되는 통계를 통해 아펜젤러와 당시 선교사들의 노력을 간접적으로 살펴 볼 수 있다.

“교육과 의료 선교,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1명의 예비 신자, 100명의 신자, 12명의 주일학교 교사, 30여 명의 배재학당 학생들, 환자들이 넘쳐나는 병원 모두는 복음의 놀라운 승리의 시작이 될 것이다.”

주한 외국인을 상대로 한 그의 목회 활동은 배재학당 가운데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1885년 5월 22일 시작된 스크랜튼의 의료 선교는 배재학당의 학생을 모집하는 결실로 이어졌고, 아펜젤러의 교육 선교는 배재학당을 발전시켜 교회 설립이라는 선교의 결실로 태동하게 된다.

배재학당의 근대 교육이 복음 전파로 이어졌던 이유는 아펜젤러의 교육 이념에 있었다. 조선 정부가 기독교 선교를 금지시키고 있는 상황 가운데, 배재학당의 학생 몇 명은 교과서에 나타났던 기독교적 가치관을 거부하고 반발하였다. 하지만 아펜젤러는 이러한 상황에 굴하지 않았다. 그는 근대교육뿐 아니라 기독교 정신을 가르치기 위해 항상 갈등했다. 미국 드루에 있는 친구 비벤에게 보낸 아펜젤러의 서한들을 보면 고민이 잘 드러난다.

“서구의 문명을 가르칠 때 기독교는 배제 될 수 없다. 나는 가장 쉬운 단어 몇 개로 기독교를 가르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1887년 6월 9일 편지의 일부)

“우리는 주님께서 이 학생들을 변화시킬 수 있음을 믿는다. 변화된 학생들은 주의 권능을 부여 받아 백성에게 선한 것을 베풀게 될 것이다. 교육은 세속적인 사역이지만 우리는 그 안에 복음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교육은 선교 사역의 통로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사역에 충성을 다하면 엄청난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1887년 7월 25일 편지의 일부)

아펜젤러의 노력은 조선 정부가 선교를 금지하고 있는 상황임에도 학생들 일부가 주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결과를 가져다 주었다. 이뿐 아니라 1887년 2월 21일, 고종이 하사하였던 배재학당의 현판이 한국 학생들에게 시사했던 영향력은 컸다. ‘배재학당(培材學堂)’이라는 현판이 걸리고 난 후에 학생들은 왕이 선교사들의 교육과 의료선교를 승인하였고 예배 참여를 허락한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화학당(梨花學堂)’, ‘시병원(施病院)’ 현판이 미치는 현상도 마찬가지였다. 현판이 하사된 후 일주일이 지나자 한국인들은 서울의 외국인 연합교회의 예배에 참석했다. 아펜젤러에 의하면 배재학당, 이화학당, 시병원에서 30명이 넘는 한국인이 몰려왔다고 한다.

이북 지역 답사 여행과 선교 확장의 꿈

아펜젤러는 1887년 4월 13일부터 5월 8일까지 26일간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와 황해도 개성시, 서흥군, 평산군, 황주군, 평안도의 평양시를 여행하였다. 원래는 장로교 의료 선교사 헤론과 함께 답사하기로 했으나 헌트와 함께 답사 여행을 시작했다. 이 여행에서 아펜젤러는 이북 지역의 풍물을 돌아보면서 이미 만주 지역의 스코틀랜드 선교사 매킨타이어와 존 로스에 의해 복음의 씨앗이 심겨졌던 지역을 되돌아보게 된다.

이들은 평양에서 로스와 매킨타이어와 동역하였던 한국인 권서가 뿌렸던 복음의 흔적을 찾았다. 하지만 이 지역의 기독교인들이 금교 정책으로 세례를 받지 못하고, 예배도 드릴 수 없고 교리서조차 가질 수 없는 상황을 바라보면서 선교가 이 지역까지 확장되는 비전을 품게 된다.

“내가 가장 바라는 소원은 마을과 시내 곳곳에서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다. 복음이 자유롭게 선포되는 날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오게 되리라. 우리 기독 학생들이 이 나라 곳곳에 흩어져 넘쳐나게 되면 이 나라 전체에 좋은 영향력을 미치게 될 것임을 알 수 있다.”

아펜젤러가 이북 지역 답사여행을 마치고 와서 최씨라는 기독교인을 만나게 된다. 최씨는 1881년 중국 목단에서 스코틀랜드 개신교 선교사였던 매킨 타이어에게 세례를 받았던 한국인이었다. 매우 신실한 그는 아펜젤러의 권서인이 되었다. 아펜젤러는 만주 지역의 존 로스와 매킨타이어의 선교가 열매 맺기를 원했다.

“이 두 분 목사님은 자신들이 뿌린 복음의 씨앗을 선교사가 거두기를 소망하신다. 권서인 최씨는 압록강에 있는 의주까지 갈 것이고 가는 도중 복음을 전파할 것이다. 최씨가 말하기를 평양에 많은 신자들이 있으며 선교사가 방문해서 세례를 베풀고 교회를 조직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나는 올 가을에 이북 지역을 반드시 다시 한 번 방문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러나 내가 가는 동안 학교를 돌보는 동역자가 없다. 이 가능성이 있는 한국으로 더 많은 일꾼들을 보내주시기를 기도한다.”

소요한(명지대 객원교수·교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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