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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완식의 우리말 새기기] 지나가는 비 잠깐 내리는 동안 ‘삽시간’


지진 후 밀려오는 무시무시한 쓰나미로 삽시간에 인근 마을이 초토화되는 모습을 봤고, 홍수나 댐 붕괴로 도시나 마을이 삽시간에 쑥대밭 되는 것도 똑똑히 봤습니다. 인간은 자연 앞에 얼마나 미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가요.

“지나가는 비에 마음을 다 적시고/ 길을 잃은 사슴처럼 울고 있어요/ 피하지도 못하게 갑자기 와서/ 당신은 떠나갔어요/…당신은 지나가는 비.” ‘지나가는 비’라는 노래 가사입니다. 사랑했는데, 어쩌다 보니 그가 여우비처럼 홀연 사라졌다네요.

‘삽시간’은 짧은 동안을 이르는 말이지요. ‘삽’(雨 밑에 妾)은 ‘지나가는 비’를 뜻하는 글자입니다. 잠시, 잠깐이라는 의미로도 쓰이지요. 그러니 삽시간은 ‘지나가는 비가 잠깐 내리는 동안’이라는 말입니다. 눈 한번 깜박하고 숨 한번 쉬는 동안이라는 뜻 순식간(瞬息間), 눈 깜짝할 사이인 (한)순간(瞬間), 약 75분의 1초라는 찰나(刹那) 등이 삽시간과 견줄 수 있는 말이지요. 예전에 본처 말고 데리고 사는 여자를 이르던 妾(첩)이 雨(비 우) 밑에 붙어 지나가는 비, 잠깐이라는 뜻의 글자로 쓰인다는 게 묘하고 얄궂습니다.

글자대로 풀면 삽시간이 순식간(한순간)보다 좀 긴 동안을 이르는 말인데 별 차이 없이 쓰입니다. 그런데 ‘소문이 삽시간에 퍼지다’ ‘삽시간에 악화된 여론’ ‘명예를 잃는 건 한순간이다’ ‘배고팠는지 녀석은 순식간에 밥 두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처럼 시간의 길이를 고려해보면 어감 차이는 있는 것 같습니다.

국회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됐습니다. 저러다 설 자리를 잃는 건 삽시간일 텐데 그들만 그걸 모르나 봅니다.

어문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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