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의 만행 기억하라” 분서갱유 현장 지하엔 텅빈 서재가…

[세계의 광장을 가다] ⑫ 베를린 아우구스트 베벨 광장

아우구스트 베벨광장은 유럽 북부의 작은 공국에 불과했던 프로이센을 제국으로 발전시킨 프리드리히 2세가 수준높은 문화국의 상징으로 조성했다. 광장이 들어선 위치와 주변의 유서 깊은 건물 때문에 베를린의 대표 광장으로 꼽힌다. 나치 정권이 사상 탄압을 위해 수만권의 책을 불태운 '현대판 분서갱유'의 현장에서 이제 민주적인 토론의 장으로 거듭나고 있다.

“책을 불사르는 곳은 결국 인류도 불태울 것이다.”

1995년 독일 수도 베를린의 아우구스트 베벨 광장 중앙바닥에 설치된 동판에는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가 쓴 구절이 새겨져 있다. 19세기를 살았던 하이네가 20세기 나치 독일이 자행한 ‘현대판 분서갱유’를 미리 예견했던 말처럼 말이다. 베를린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나치 독일의 상흔이 곳곳에 남은 도시다. 때로는 분노와 저항의 무대였고, 증오와 배제의 현장이기도 했다.

광장의 중앙 바닥에 설치된 동판에는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가 '책을 불사르는 곳은 결국 인류도 불태울 것이다'고 경고한 말이 새겨져 있다.

코로나19가 유럽에 확산되기 전인 지난해 2월 9일 베를린 가로수길 ‘운터 덴 린덴’의 끝자락에 자리잡은 아우구스트베벨 광장을 찾았다. 1933년 5월 나치 추종자들이 베를린훔볼트대학 도서관에서 수만권의 책을 끄집어내 공개적으로 불태운 ‘현대판 분서갱유 사건’이 발생했던 곳이다. 1810년 벨헬름 폰 훔볼트와 알렉산더 폰 훔볼트 형제는 대학교가 귀족을 위한 교육기관이 아니라 자연을 탐구하고 연구하는 장소가 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로선 혁신적인 아이디어였다. 훔볼트 형제가 설립한 이 대학의 ‘연구 중심 대학’이란 개념은 전 세계 모든 대학의 모델이 됐다.

역설적이게도 연구 중심 대학으로 시작된 베를린훔볼트대의 도서관 앞 광장이 현대판 분서갱유로 수만권의 책이 불태워진 장소가 됐다. 149명의 유대인, 공산주의자, 나치에 반대하는 자유주의 저자들의 책들이 주대상이었다. 현재 베벨 광장의 중앙바닥에는 투명한 유리상판이 있는데, 그 아래로 텅 빈 서재가 보인다. 텅 빈 서재는 나치에 의해 책이 불태워져 서재가 비어버렸음을 상징한다. 1995년 이스라엘 출신의 조각가 미카 울만이 만든 것이다. 미카 울만은 지하 5m 깊이로 땅을 파고 텅 빈 책꽂이를 채워 넣었다. 이 지하공간의 서가는 나치에 의해 연기로 사라진 책 2만권을 꽂을 수 있는 규모다.

베벨 광장은 유럽 북부의 작은 공국에 불과했던 프로이센을 강국으로 발전시킨 프리드리히 2세가 조성한 광장이다. 원래 이름은 ‘포룸 프리데리치아눔(Forum Fridericianum)’이었다. 18세기에 만들어진 포룸 프리데리치아눔에는 오페라극장, 하인리히궁전(현재 훔볼트대학), 왕립도서관, 성당이 들어서 있다. 이후 1947년 사회민주당을 공동 설립한 아우구스트 베벨의 이름을 따서 이름이 바뀌었다. 포룸 프리데리치아눔의 중심인 베벨 광장은 건축적 공간이자 역사를 기념하는 장소로 한가로이 거닐기에 좋다. 광장이 들어선 위치와 주변의 유서 깊은 건물 때문에 베를린을 대표하는 광장으로 꼽힌다.

평생 전쟁터를 오갔지만 프리드리히 2세는 프로이센을 수준 높은 ‘문화국’으로 만들어 독일의 야만적 이미지를 지워버리고 싶어했다. 그래서 18세기 베를린의 중심지에 왕립 도서관, 오페라극장, 성 헤트비히 대성당을 건설해 과학·예술·종교를 통합하는 상징적인 광장을 만들어 그 꿈을 실현하려고 했다. 그러나 프리드리히 2세의 ‘문화국 프로이센’의 꿈은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된 ‘독일판 분서 갱유’ 사건으로 무너지고 만다.

시민사회의 치열한 성찰을 통해 베벨 광장은 사상 탄압의 아픈 역사를 딛고 민주적 토론의 장으로 거듭났다. 2006년 9월 9일 열린 ‘자유발언대’ 행사에는 전 세계에서 과학자, 의사, 시민운동가, 예술·문화 인사들이 베벨광장에 모여들어 대중 토론을 벌였다. 앞서 2002~2004년 기존 주차공간을 없애고, 2005~2006년 과거 형태대로 외부공간을 복원했다. 그 결과 아우구스트베벨 광장으로 통하는 길이 넓어졌고 시민들이 광장에 모이기 쉬워졌다.

베벨 광장에서 운터 덴 린덴 건너편을 바라보면 ‘노이에 바헤’라는 추모 공간이 있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 카를 슁켈이 1818년에 만들었다.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고대 그리스의 신전과 같은 품격있는 건물로 꼽힌다. 통일 후 1993년 새로 단장한 노이에 바헤는 전쟁과 독재로 인해 희생된 모든 사람을 추모하는 공간이 되었다. 특히 여류 예술가 케테 콜비츠의 조각상 ‘죽은 아들을 안고 있는 어머니’가 내부에 설치돼 숙연감을 느끼게 한다. 1차 세계대전 중 아들을 잃은 콜비츠의 상실감을 표현한 작품으로, 수많은 전쟁 피해자들을 위로하고 있다.

베를린의 잔다르멘 마르크트 광장과 위그노 예배당으로 사용됐던 프랑스 돔.

베벨광장에서 남쪽으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잔다르멘 마르크트 광장이 있다. 18세기 프랑스에서 종교박해를 피해 프로이센에 망명한 위그노(프랑스 신교도)의 거주지에 생긴 광장이다. 프랑스에서 신교도를 박해하자 피난길에 오른 위그노를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받아들인 것이다. 당시 기병대의 마굿간이 부근에 있었기 때문에 기병대를 뜻하는 프랑스어에서 광장 이름이 유래했다. 광장 중앙의 그리스 신전 같은 건물은 1821년 카를 슁켈이 만든 콘체르트 하우스로, 오늘날까지 최고의 공연장으로 명성이 높다.

광장 양편에 쌍둥이처럼 생긴 프랑스 돔과 독일 돔이 있다. 프랑스 돔이 1705년에, 독일 돔은 1708년에 각각 지어졌는데 이후 1785년에 건축가 카를 폰 곤타르트가 두 건물에 같은 모양의 돔을 추가했다. 프랑스 돔은 종교 자유를 찾아 이국에 보금자리를 마련한 위그노의 전당이다. 오늘날 내부는 위그노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고, 돔은 전망대로 개방하고 있다. 독일 돔은 프랑스 돔 맞은 편에 루터파 교회로 지어졌다. 오늘날에는 독일 연방의회가 운영하는 독일 역사박물관으로 쓰이며, 독일 민주주의의 역사를 연대기순으로 소개하고 있다.

관광객들이 베벨광장에 설치된 투명한 유리판으로 텅빈 서재를 내려다보고 있다. 텅빈 서재는 나치의 만행으로 수만권의 책이 불타 없어져 서재가 비어 있음을 상징한다.

베를린 시내 한복판에는 2차 세계대전 중 나치의 폭력으로 학살당한 수많은 유대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홀로코스트 추모비가 있다. 추모비 부지에 높이가 제각각인 석관 2711개가 반듯하게 놓여 있다. 부지 한쪽 끝 계단을 내려가면 지하에 만들어진 박물관을 만나게 된다. 유대인 희생자들의 생애, 그들이 남긴 편지와 가족 사진 등 애틋한 자료들이 전시돼 있어 보는 이들을 숙연하게 한다. 특히 나치 대학살로 숨져간 유대인들의 신발이 쌓여 있어 과거의 참상을 생생하게 증거하고 있다.

베를린 문화포럼 건너편에는 독일저항기념관이 있다. 1944년 7월 ‘발키리’라는 작전명으로 독재자 히틀러 암살을 시도했던 군인들이 쿠테타에 실패해 처형된 곳이다. 영화로도 제작됐던 이 사건은 독일 내에서도 무의미한 전쟁을 종식시키려 한 저항자들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베를린=김재중 선임기자 jjkim@kmib.co.kr

[세계의 광장을 가다]
▶⑨“죽어서도 佛 감시할 것”… 넬슨 제독 호국정신 숨쉰다
▶⑩‘프라하의 봄’·벨벳 혁명 항거의 현장… 체코 현대史를 만들다
▶⑪유럽 호령한 루이 14세·나폴레옹 자취 새겨진 ‘황제의 응접실’
▶⑬네온사인·전광판 휘황한 ‘만남의 명소’… 영국판 타임스스퀘어
▶⑭12개 대로와 만나는 개선문 광장… 파리의 ‘별’로 빛나다
▶⑮독립염원 새긴 기념비·조각상·연못 어우러져 ‘보행자 천국’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