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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 깨시민 우월주의

김상기 콘텐츠퍼블리싱부장


에이, 설마! 얼마 전 트위터에서 이 소식을 접하곤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참 고약한 장난을 쳤구나’하고 생각했다. 도저히 내 상식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였다. 20세기 가장 존경받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헬렌 켈러가 ‘백인의 특권’을 누린 인물이니 맹목적 추종을 취소해야 한다니! 트위터에는 ‘#cancelhelenkeller’ 등의 해시태그를 단 글이 잇따랐다. 무시와 삭제를 넘어 적극적인 파괴가 거론되기도 했다. 미국 의회의사당에 있는 그녀의 동상을 뽑아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에 실린 기사에서 사달이 시작됐다. 보통 사람들은 헬렌 켈러를 시각과 청각, 언어장애라는 삼중고를 강한 의지로 이겨낸 인물로만 기억하겠지만 사실 그녀는 노동자 권익 보호와 여성 참정권 쟁취, 인종차별 철폐를 위해 투쟁한 급진적인 사회주의 운동가였다는 내용의 기사였다. 그런데 기사 중 한 토막이 화근이 됐다. 일부 흑인 여성 장애인 인권 운동가들이 헬렌 켈러는 백인의 특권으로 명성을 얻었고, 우생학을 지지한 이력이 의심된다며 비판했다는 내용이었다. 이게 트위터 등 SNS에서 해시태그(#)를 달고 오르내리면서 논란이 눈덩이처럼 불거졌다. 헬렌 켈러마저 미국에 휘몰아친 ‘캔슬 컬처(cancel culture)’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것이다. 자신의 피부색조차 보지 못했을 그녀에게 백인 특권이라니.

캔슬 컬처란 조지 플로이드 사건 이후 인종차별적 언행을 한 인물이나 기업 등을 타깃으로 삼으며 성장한 사회문화 운동이다. 그런데 ‘정치적 올바름’으로 무장한 ‘깨(어있는) 시민’들은 너무 나갔다. 인종차별을 끊고야 말겠다는 신념은 점차 과격해졌고 급기야 사이버상의 무분별한 집단 공격으로 변질했다. ‘해리포터’ 시리즈의 작가 조앤 롤링과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등이 조리돌림을 당했다. 코미디언이자 토크쇼 진행자인 지미 팰런은 20년 전 흑인 분장을 했다는 이유로 차별주의자 낙인이 찍혔다. 어디 사람뿐일까. 워너 브라더스의 만화영화 ‘루니툰스’에 나오는 스컹크 ‘페페 르 퓨’는 검은 고양이 ‘페넬로페’에게 들이댄다는 이유로 성범죄를 방조한다는 비난을 샀고, 차기작에서 삭제됐다. 메이저리그 명문 구단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는 팀명 교체 압력을 받았다. 구단은 1915년부터 사용해온 팀명을 내년 시즌부터 가디언스로 바꾸기로 했다.

미국에 캔슬 컬처가 있다면 우리에겐 뭐가 있을까. ‘프로 불편러’ 정도가 될까. 이름이야 무엇이든 이들에게 걸리는 순간, 온전히 버티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다구리’ 앞엔 장사가 없다. 가나에서 온 샘 오취리가 생각난다. 그는 얼굴을 검게 칠한 의정부고등학교 학생들의 ‘관짝 소년단’ 패러디를 보고 “흑인 입장에서 불쾌하다”고 비판했다가 미움을 샀다. 정작 자신은 방송에서 눈 찢기를 하고 여배우 사진에 달린 성희롱 댓글에 동조하는 덧글을 달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방송가에서 하차하는 시련을 겪었다. 일이 터진 지 1년이 지났으나 오취리는 여전히 네티즌들에게 캔슬 대상이다. 한국에서 모금한 돈으로 고국 가나의 어려운 아이들을 위한 ‘572 학교’를 세우고 나중에 가나 대통령이 되고 싶다고 했던 청년은 이제 한국 네티즌들의 욕받이로 전락했다.

중세의 마녀사냥은 잔혹했다. 사냥꾼들은 마녀로 지목된 사람의 손발을 묶어 물에 던졌다. 가라앉아 죽으면 무죄요 떠오르면 마녀라며 처형했다. 혹은 불에 달군 쇠판을 걷게 했다. 걷다 죽으면 무죄요 살아오면 화형에 처했다. 이래도 죽이고 저래도 죽이는 야만과 광기의 세월이었다. 키보드 앞 깨시민들이 우월의식에 젖어 벌이는 21세기 사이버 마녀사냥은 중세의 마녀사냥과 다를까.

김상기 콘텐츠퍼블리싱부장 kitti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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