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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 50억과 벼락거지

김상기 콘텐츠퍼블리싱부장


와, 이건 예상하지 못했다. 9화 시리즈를 몰아보느라 추석 연휴 황금 같은 하루를 온전히 날렸을 때부터 뭔가 싸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대박이 날 줄이야.

넷플릭스의 한국 오리지널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열풍으로 지구촌이 뜨겁다. 실시간으로 각국 넷플릭스 순위를 집계하는 ‘플릭스패트롤’을 보면 인기가 얼마나 많은지 실감할 수 있다. 여태껏 이런 적이 있었나. 29일 현재 전 세계 83개국 중 78개국에서 오징어 게임이 선두를 질주하고 있다. 아시아에서 제작된 드라마가 미국 드라마 톱 순위에 오르기는 처음이란다. ‘덱스터’나 ‘로스트’ 같은 ‘미드’에 열광하던 세계가 어느새 한국어 100% 드라마에 푹 빠져 있다. 맙소사, 넷플릭스 역사상 최고 흥행작이 토종 ‘한드’라니.

압도적 흥행몰이에 호평도 잇따르고 있다. 미국 로튼토마토닷컴 신선도 지수가 100%다. 경제지 포브스는 “기이하고 매혹적인 작품”이라며 꼭 봐야 할 작품으로 꼽았다. 그리고 오징어 게임 6화 ‘깐부’ 편에 대해선 “뛰어난 연기, 기억에 남는 캐릭터, 창의적인 사건으로 가득한 강력한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드라마 속 굿즈도 인기몰이 중이다. 핼러윈을 맞아 진한 분홍색의 진행요원 복장과 녹색의 참가자 운동복이 이베이에 등장했다. 네모 세모 동그라미를 담은 티셔츠와 달고나 뽑기 세트 등이 불티나게 팔린다고 한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에서 눈동자를 무섭게 돌리던 인형을 실제로 설치한 필리핀 쇼핑몰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세계 곳곳의 골목에서 딱지치기하고 달고나를 굽고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는 인증 동영상이 SNS에 쉴 새 없이 오르고 있다. BTS의 K팝, 기생충의 K무비에 이어 오징어 게임의 K드라마까지, K컬처가 세계 시장에서 연일 맹위를 떨치고 있다. 환상 특급을 탄 것만 같다. 하지만 판타지는 거기까지, 우리의 현실은 암울하기 짝이 없다.

곽상도 의원의 아들이 화천대유자산관리(화천대유)에서 퇴직하면서 50억원을 받았다고 시인했다. 아들 곽씨는 그러나 아버지의 소개로 입사해 열심히 일하고 정당하게 받은 대가라고 했다. 또 자신은 치밀하게 설계된 오징어 게임 속 ‘말’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곧바로 비난이 쏟아졌다. 오징어 게임 팬들이 발끈했다.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오징어 게임 갤러리’ 회원들은 “오징어 게임에 참가하는 이들은 대부분 감당할 수 없는 채무를 지고 삶의 벼랑 끝에 몰린 사람들”이며 “청와대 민정수석을 거쳐 대한법률구조공단 이사장으로 재직 중인 아버지의 소개로 회사에 입사한 곽씨가 성과급 및 퇴직금 명목으로 50억원을 받은 것과 현실을 비교해 보면 적절하지 않은 비유”라고 지적했다.

오징어 게임을 보긴 한 걸까. 참가자들은 임의로 게임을 중단할 수 없고 게임을 거부하면 탈락자로 처리돼 흔적도 없이 사라져야 하는데, 50억원을 받은 게 어떻게 같다는 말인지 헷갈린다. 곽씨 외에도 이 회사에서 일한 박영수 전 특별검사의 딸은 화천대유의 미분양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또 최근 퇴직한 임원은 100억원에 가까운 돈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청춘에겐 대한민국의 현실이야말로 오징어 게임이다. 연애와 결혼 출산 등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것 세 가지를 포기하고도 모자라 집과 경력 희망 인간관계 건강 외모까지도 꿈꾸지 못하는 시대가 됐다. 설상가상으로 집값이 폭등하니 청춘은 벼락거지의 신세가 됐다. “게임 밖을 나와 보니 그 사람들 말이 맞더라고. 여기가 더 지옥이야.” 오징어 게임 속 오일남 할아버지의 한탄이다. 퇴직하면서 50억원을 받은 사람이 있고, 숨만 쉬며 사는데도 벼락거지가 된 사람이 있다. 과연 누가 오징어 게임의 말일까.

김상기 콘텐츠퍼블리싱부장 kitti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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