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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세 암투병 이어령 “죽음은 그만 돌아오라는 엄마의 부름”

[책과 길]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김지수 지음, 열림원, 320쪽, 1만6500원

이어령 전 이화여대 석좌교수(오른쪽)가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 김지수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 기자는 매주 화요일에 이 전 교수를 방문해 열여섯 차례 인터뷰를 해서 책을 썼다. 이 사진은 1년에 걸쳐 진행된 인터뷰가 끝나는 날 사진가 김용호가 찍은 것이다. 김용호 제공

“죽음이라는 게 거창한 것 같지. 아니야. 내가 신나게 글 쓰고 있는데, 신나게 애들이랑 놀고 있는데 불쑥 부르는 소리를 듣는 거야. ‘그만 놀고 들어와 밥 먹어!’

이쪽으로, 엄마의 세계로 건너오라는 명령이지. 어릴 때 엄마는 밥이고 품이고 생명이잖아.… 그렇게 보면 또 하나의 생명이지. 어머니 곁, 원래 있던 모태로의 귀환이니까.”

이어령 이화여대 명예석좌교수는 신나게 놀고 있는데 엄마가 ‘얘야, 그만 놀고 들어와 밥 먹어라’하고 부르는 소리를 듣는 게 죽음이라고 말한다.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거라네. 죽으면 ‘돌아가셨다’고 하잖아. 탄생의 그 자리로 가는 거라네. 그래서 내가 일관되게 얘기하는 것은 죽음은 어둠의 골짜기가 아니라는 거야.”

죽음이 어둠의 골짜기가 아니라면 뭐라는 걸까.

“5월에 핀 장미처럼 가장 아름답고 찬란한 대낮이지. 장미밭 한복판에 죽음이 있어. 세계의 한복판에. 생의 가장 화려한 한가운데. 죽음의 자리는 낭떠러지가 아니야. 고향이지.”

그렇다고 해도 삶이 간절하지 않은 건 아니다.

“환생, 부활… 나는 그런 걸 아직 몰라. 기독교인이니 겉으로는 받아들이지만, 그 부분에 관해서는 사실 낫싱(nothing)이야. 무언가 있다고 생각하면 삶이 이렇게 절실할까. 끝이라고 생각하니 절실한 거야.”

88세의 이 교수는 암 투병 중이다. 복막에서 시작된 암세포가 맹장과 대장, 간으로 전이했다. 두 번째 수술을 받은 후 그는 치료 중단을 선언했다. 집에서 죽음을 맞이하기로 했다. 그리고 자신이 진입한 죽음의 과정을 들여다보면서 그것에 대해 쓰고 말하기로 했다. ‘시대의 스승’으로 불렸던 그가 ‘죽음의 스승’이 되기로 한 것이다.


김지수 기자가 묻고 이 교수가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된 인터뷰집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은 죽음의 그림자 속에서 그가 느끼고 생각한 것들을 들려준다.

이 교수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존경은 받았으나 사랑은 못 받았어”라며 “그래서 외로웠네”라고 회고한다. “다르게 산다는 건 외로운 거네”라면서.

그는 질문하는 사람, 생각하는 사람으로 살고 떼 지어 살지 말라고 조언한다. 외롭더라도 자기 인생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평생 남이 시키는 일만 하다가 처자식 먹여 살리고, 죽을 때 되면 응급실에서 유언 한마디 못하고 사라지는 삶… 그게 인생이라면 너무 서글프지 않나. 한순간을 살아도 자기 무늬를 살게.”

그는 최고의 석학으로 꼽혔지만 신념은 위험하다고, 신념에 기대 사는 건 시간 낭비고 거짓이라고 말한다.

“관점에 따라,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게 인간사인데 ‘예스’와 ‘노우’만으로 세상을 판단하거든. 메이비(maybe)를 허용해야 하네. 메이비 덕분에 우리는 오늘을 살고 내일을 기다리는 거야.”

이 교수는 소파에 앉아서 “내 몸은 이미 불꽃이 타고 남은 재와 같다네”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여전히 강력하다. 문명과 세계에 대한 거대 담론으로 거침없이 뻗어가고, 어느 순간엔 앞에 놓인 컵이나 간밤에 내린 눈에 대한 작고 아름다운 이야기로 빠진다.

“이 컵을 보게. 컵은 컵이고 나는 나지. 달라. 서로 타자야. 그런데 이 컵에 손잡이가 생겨봐. 관계가 생기잖아. 손잡이가 뭔가. 잡으라고 있는 거잖아. 손 내미는 거지. 그러면 손잡이는 컵의 것일까. 나의 것일까.”

어쩌면 유언처럼 읽힐 이 인터뷰집에서 그는 “눈물 한 방울이 내가 전하고 싶은 마지막 말”이라고 말한다.

“이 시대는 핏방울도 땀방울도 아니고 눈물 한 방울이 필요하다네. 지금껏 살아 보니 핏방울 땀방울은 너무 흔해.” “눈물만이 우리가 인간이라는 걸 증명해준다네.” “인간을 이해한다는 건 인간이 흘리는 눈물을 이해한다는 거라네.”

그는 거듭해서 눈물에 대해 말했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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