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들고 지치지만 ‘나의 길’이 있으니까… I am fine, here”

가족들 도움 거절하고 독립 선언
찾은 이유도 머무는 기간도 다양 한
푼이라도 더 아끼려 불편함 감수


지난달 22일 서울의 여성 전용 C게스트하우스에 정유빈(가명·27)씨가 커다란 짐가방을 들고 들어섰다. 한 달 치 숙박비를 결제하고 들어온 정씨는 주뼛거리며 짐을 풀었다.

지방 국립대를 졸업한 정씨는 고향인 전북의 한 학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런데 2년 전 코로나19 팬데믹 상황이 되면서 학원은 문을 여는 날보다 닫는 날이 더 많아졌다. 학원 수업이 없는 날이면 가족들 눈치가 보여 출근하는 척 밖에 나와 멍하니 앉아 있기도 했다.

비슷한 일상이 되풀이되자 정씨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더 늦기 전에 독립하고,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이왕 새로운 도전을 하는 거라면 더 큰 세상을 경험해보고 싶었다”며 “미안하지만 고향에서는 비전을 찾기 어렵다는 생각에 서울로 올라왔다”고 말했다.

가족들에게도 독립을 선언했다. 어머니가 비싼 서울 집값을 걱정하며 “보증금을 보태주겠다”고 했지만 “혼자 서울에서 살아보겠다”며 거절했다. 고민 끝에 찾은 정씨의 꿈은 네일숍을 개업하는 것. 손재주가 좋다는 얘기를 듣는 그는 평소 관심 분야인 뷰티와 접목해 네일아트를 배우고 싶다고 마음먹었다.

그가 상경할 때 손에 쥔 돈은 500만원이 채 되지 않았다. 네일아트 자격증 학원비는 40만원가량. 보증금을 내고 원룸을 구하기도 빠듯했다. 그래서 문을 두드린 곳이 여성 전용 게스트하우스였다. 혼숙이 가능한 게스트하우스보다 조금 더 비쌌지만 이만한 곳이 없었다. 8인실 1박에 1만3000원. 한 달 40만원이면 된다.

호기롭게 서울로 올라왔지만 연말을 앞두고 두려움이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기도 했다. 새해 스물아홉이 된 정씨는 “‘곧 서른인데 왜 아직까지 나만 이렇게 방황하고 있지’ 하는 생각도 드는데, 또 여기 와보니 다들 비슷하게 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고 말했다. 게스트하우스에서의 1차 목표는 일단 3개월만 버티는 것이다. 우선 주얼리 회사 아르바이트와 네일아트 자격증 준비를 병행하며 한 달을 보낼 계획이다. 정씨는 “서울에서 자리를 잡고 게스트하우스와 쿨하게 작별인사 하고 싶다”고 했다.

일하는 청년에겐 ‘공유 오피스’

게스트하우스에 투숙하는 이들의 투숙 기간은 들쑥날쑥하다. 몇 개월 치 숙박비를 미리 내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하루 이틀씩만 묵고 가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다 보니 게스트하우스는 늘 새로 발을 들이는 이들과 떠나는 이들로 엇갈린다.

지난달 22일 B게스트하우스 8인실 맞은편 2인실에 ‘1박’ 게스트들이 들어왔다. 방 안에서는 타닥타닥 노트북 두드리는 소리만 들렸다. 친구 사이인 강성윤(가명·25)씨와 김준(가명·26)씨가 조용하게 같이 일할 공간을 찾아 이곳을 구한 것이다.

두 사람은 온라인 쇼핑몰에 접수된 고객 불만사항에 댓글을 달고 상담을 하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강씨는 “가격이 저렴하면서도 조용히 집중할 수 있어서 가끔씩 찾는다”고 말했다. 5시간은 꼬박 민원 대응을 해야 하루 할당량을 채우는데 독방에서 편안하게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일할 수 있어 좋다고 했다. 일하다 누워서 쉴 수도 있고, 일이 마무리되면 그 자리에서 잘 수도 있다.

김씨는 친구 강씨를 따라 이날부터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옆에서 일하는 방식을 보고 배우기 위해 함께 이곳으로 왔다. 모델을 꿈꾸는 김씨는 “당장 모델로 활동하겠다는 꿈만으론 밥벌이가 안 되니까 부수입 루트를 여러 개 만들어 놓을 생각”이라고 했다. 이들에게 게스트하우스 2인실은 함께 꿈을 준비하는 숙소이자 ‘공용 오피스’인 셈이다.

A게스트하우스에서 1년째 투숙하며 입퇴실자를 관리하는 박모(47) 매니저는 “돈이 많은데도 여기가 좋아서 사는 청년은 없다”며 “돈을 조금이라도 벌면 다들 인근 원룸이나 고시원으로라도 나가려 한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싼값에 끌려 이곳을 찾아 생활하지만 여러 명이 함께 방을 써야 해 불편함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게스트하우스엔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아 매일같이 새로 짐을 푸는 청년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제주도에 살면서 장편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고 있는 이상준(가명·37)씨도 회의나 모임 때문에 서울에 올 때면 종종 게스트하우스를 찾는다. 지난달 21일에는 마포구 상암동에서 영화감독들과 모임을 한 뒤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제주에 머물 때는 그곳에서 생활하는 젊은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영상에 담는 작업을 한다.

7년 전 제주로 내려간 이씨는 성산포 앞 일식집에서 음식을 만들고 게스트하우스도 운영했다. 그러다 2년 전 ‘더 늦기 전에 하고 싶었던 일 제대로 해보자’며 카메라를 잡았다. 늦게 찾은 꿈이지만 이씨는 “멀리 보고 가려고 한다”고 했다. 그는 프리랜서로 촬영과 편집일을 하며 생활비를 벌고 있다. 타지에서 일을 하게 될 때면 위치도 좋고 싸고 편하게 묵을 수 있어 게스트하우스를 찾는다고 했다.

그가 내년 하반기를 목표로 제작 중이라는 다큐멘터리 제목은 ‘I’m fine, here’. 넉넉지 못한 주머니 사정으로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푸는, 하루하루를 버티며 현재를 살아가는 청춘들에게 보내는 메시지처럼 들렸다. ‘난 여기서도 괜찮아.’

박민지 신용일 기자 pmj@kmib.co.kr

[청년, 오늘]
▶①-1“월세방도 사치” 하루 8100원짜리 방에서 꿈 키우는 청춘들
▶②-1‘중고신입’의 굴레… 올해로 10번째 입사 준비
▶②-2입사해도 소모품처럼 쓰이다 아웃 … 저스펙자, 슬픈 취업 유랑
▶②-3청년 일자리 암흑기… 고스펙자도 인턴 다회차 필수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