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촛불혁명’ 일부 진영 독점안돼… 포용적 리더십 중요”

석학에게 길을 묻다 <2> ‘역사학자’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지난달 23일 서울 강남구 한국역사연구원에서 국민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이 교수는 ‘민주화’나 ‘촛불혁명’을 일부 진영이 독점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고 진단했다. 최현규 기자

서울 강남구 한국역사연구원에서 최근 만난 이태진(79) 서울대 명예교수는 역사 바로잡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올 3월 출간을 목표로 제자 교수들과 함께 ‘일제 식민사학 비판 총서’ 시리즈를 준비하는 중이다. 전체 8권 중 1·8권을 이 교수가 집필한다. 동아시아 전체를 대상으로 일본의 역사 왜곡이 어떤 방식으로 이뤄졌는지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있다고 했다.

이 교수는 지금의 현실에 영향을 미치는 ‘역사학’의 힘에 주목한다. 그는 “일본이 아직도 과거 제국의 영광에 사로잡혀 있으면 동아시아 미래는 어둡다”라고 말했다. 자연스레 현 정부의 한·일 관계에 대한 평가와 전망 문제로 인터뷰가 시작됐다. 다음은 이 교수와의 일문일답.

-현 정부의 대일외교를 평가하자면.

“일본을 비판하는 것은 좋은데, 그 수준이 시대와 걸맞지 않다. ‘토착 왜구’ ‘친일 색출’ 등이 대표적인 예다. 이런 말들은 광복 직후부터 1960년대까지 우리 사회에 많이 돌았다. 80년대 민주화 운동 흐름 속에서 사회주의 영향을 받은 ‘민중 사학’이 유행하면서 이런 구호가 재부상했다. 그 영향이 오늘에도 미치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반제국주의 구호는 이제 낯설 정도로 세상이 크게 바뀌었다. 그런 방식으로는 상대방으로부터 비웃음을 살 뿐이다. ‘철 지난 구호’는 접어야 할 때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우리 역사학계가 더 분발해야 한다. 일본 역사학계도 크게 달라져야 한다. 일본 학계가 주변국 침략을 정당화한 제국시대 역사학의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의 역사를 교과서를 통해 국민에 가르쳐야 한다. 대다수 국민의 머리에 제국시대 영광이 박혀 있는데 양국 정상이 만나서 성명서를 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 학계도 진영 논리로 역사를 재단하려 드는 우를 범하면서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처지다. 정권이 바뀌면 국가 연구 기관의 책임자가 덩달아 바뀌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다.”

-‘촛불’을 내건 현 정부 출범 5년이 지났다.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까.

“촛불 혁명에 많은 기대를 실었지만, 실제 흘러가는 것을 보니까 아니더라. 당시만 해도 중도 세력의 외연이 많이 확장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촛불 민심을 두루 대표하지 못하고 특정 세력만의 정권이 됐다. 중도의 새로운 가능성도 죽어 버렸다. 부동산 정책을 비롯한 주요 경제 정책은 약자를 돕는다는 선의를 표방했다. 세계사적으로 선의를 깃발로 내건 메시아적 이데올로기의 성공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21세기 들어와 날로 다변화하고 있는 사회경제 문제를 19세기 산업혁명 시대의 메시아니즘으로 접근하니 실패할 수밖에 없다. 다시 밟지 말아야 할 역사적 경험이었다고나 할까.”

-이번 대선의 시대정신을 꼽는다면.

“벌써 후보들이 다 말하고 있지 않나(웃음). 우리나라 정당 홈페이지를 들여다보다 참 기이한 걸 발견했다. 이데올로기가 한눈에 보이게 적혀 있지 않았다. 여야 정당의 강령을 자세히 보면 부분적으로 차이가 나지만 중복되는 게 상당히 많다. 누가 그걸 한참 들여다보면서 읽고 있겠나. 미국 정당들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각기의 ‘이데올로기’를 구체적으로 직접 밝히고 있다.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분명히 드러내고 경쟁해야 한다.”

-어떤 리더십이 필요한가.

“포용적인 리더십이 필요한 시대 아닌가 싶다. 국가 운영 시스템을 폭넓고 세밀하게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여러 측면을 융합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것을 찾아내야 한다. ‘민주화’나 촛불 혁명을 일부 진영이 독점하려고 해서도 안 된다. 자유당 독재에 대해서 온 국민이 모두 나서다시피 했다. 80년대 민주화도 당시 운동권 학생들이 중심 역할을 했지만, 이를 지지하는 수많은 넥타이부대가 있었다. 최종적으로는 일반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 성공했다. 촛불도 마찬가지다. 넓은 사회계층이 참여했다. 특정 정치 세력이 과실을 독점하면 실패하고 만다.”

-‘공정’이 사회적 이슈다. 주요 대선 후보들도 공정을 언급하는데.

“한국 사람의 DNA에는 강한 비판 의식이 작동하고 있는 것 같다. 불의를 보면 가만히 참지 못한다. 조선 시대를 봐도 언관(言官) 기관이 셋이나 되는데 세계사상 유례가 없다. 왕한테 올리는 상소가 이렇게 많은 왕조를 찾기도 힘들다. 그만큼 자기 의견이 많다는 것이다. 이는 붕당정치와도 무관치 않다. 조선 시대 성리학에서 말하는 공도(公道)는 곧 영어의 Justice(정의)와 같은 말이다. 공도를 실현하기 위해 각자 학파에 따라 여러 논리를 펼쳐 말이 많았다. 이게 ‘한국의 힘’이다. 하지만 이것을 ‘제대로 처리하는 역량’이 곧 역사의 승패를 결정한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앞으로 한국 사회의 주요 과제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기후변화 문제가 주요 과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조선 왕조 500년 중 가운데의 270년은 자연재해 연속의 시대였다. 1490~1760년은 이른바 ‘소빙기’로서 기온이 떨어지는 자연 재난이 계속됐다. 지금의 지구 온난화와는 반대였지만 재난은 마찬가지였다. 이 연속적인 재난의 실상은 조선왕조실록에 다 담겨 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도 의미가 있겠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천재지변이 일어나 기근이 들자 나라에서 열심히 진휼 정책을 썼다. 쌀이 모자라자 명예직급을 내주는 납속공명첩을 발급해 여유 곡식을 거둬들였다. 나라가 굶어 죽는 사람을 구제하려는 안간힘이었다. 대동법과 균역법을 시행해 백성들의 부담을 줄이고, 기근 구제에 바로 투입할 수 있는 곡식과 면포를 토지세로 거두었다. 이런 지혜의 동원으로 조선 왕조는 17세기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망하지 않고 살아남았다. 코로나 대응도 마찬가지다. 장기적이고 과학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위기를 극복하는 것은 결국 지혜다.”

이태진 교수는 1977년 모교인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로 부임해 32년간 우리 역사를 바로 알리는 데 앞장섰다. 서울대 규장각 도서관리실장을 맡아 프랑스가 외규장각 도서를 훔쳐간 과정을 밝혔다. 대한제국 시기 여러 문건에서 황제 서명이 위조된 것을 발견해 일제 강점의 불법성도 지적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 역사학회 회장, 한국학술단체연합회 회장 등을 지냈다.

김판 신용일 기자 pan@kmib.co.kr

[석학에게 길을 묻다]
▶①“양극화와 기후변화, 향후 30년간 해결해야 할 핵심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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