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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 탈혼밥과 답정너

김상기 콘텐츠퍼블리싱부장


혼자 밥 먹기, 즉 ‘혼밥’에도 레벨이 있다. 인터넷에 나도는 ‘혼밥 레벨 테스트’를 보면 총 9개 등급으로 돼 있는데 따져보니 난 레벨 7쯤 된다. 3개 등급으로 묶어 상중하로 나누면 상등급에 속하니 혼밥 고수인 셈이다.

하수 단계인 레벨 1~3은 어렵지 않다. 편의점(레벨 1)이나 학생식당·푸드코트(레벨 2)에서, 패스트푸드점(레벨 3)에서 혼자 먹기인데 ‘차도남’에게 이 정도는 땅 짚고 헤엄치기다. 레벨 4~6의 중수 단계부터는 일종의 도전이다. 베이비붐 세대의 끝자락에 태어나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식 교육을 충실히 받은 데다 ‘아싸’의 기질마저 타고난 내게는 입술에 침을 바르고 용기를 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레벨 4는 분식집에서 김밥이랑 라면을 혼자 먹는 것인데 한창 도전하던 중에 학원 수업을 마친 학생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진땀을 뺐다. 레벨 5는 냉면집이나 중국집 같은 전문 요리점 공략하기. 이건 10분도 안 돼 후루룩 음식을 먹어 치울 수 있으니 오히려 레벨 4보다 쉬웠다. 6단계는 유명 맛집에서 혼자 먹기. 이것 또한 ‘인싸’인 양 열심히 사진을 찍으며 먹다 보니 어렵지 않게 클리어할 수 있었다. 혼밥 레벨 도전은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혼자 먹기인 레벨 7에서 끝이 났다. 옆 테이블에 앉은 어린아이가 힐끗힐끗 쳐다보는 건 견딜 수 있었지만 아이 엄마가 “얘, 그만 쳐다봐. 아저씨도 다 사정이 있겠지”라고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을 때 ‘아, 내 혼밥 도전은 여기까지군’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 혼밥하지 않겠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지난해 9월 한 지상파 예능에 출연해 ‘대통령이 되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을 묻는 말에 대한 답변이다. 달걀을 10개나 풀어 통통하게 각 잡힌 계란말이를 솜씨 좋게 말아내고 김치찌개와 불고기까지 척척 요리한 그는 “밥이란 소통을 위한 기본”이라면서 “야당 인사나 언론인, 격려가 필요한 국민과 늘 점심, 저녁을 먹겠다. 필요하면 두 끼씩 먹더라도 여러 사람하고 늘 밥을 먹으면서 소통하겠다”고 다짐했다. 혼밥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라고 믿고 ‘도장 깨기’에 나섰던 내게 그 선언은 엉뚱하지만 신선했다. 스마트폰에 갇혀 각박하게 사는 ‘불통’의 세상에 할머니부터 손자까지 온 가족이 한방에 모여 식사를 하는 ‘전원일기’의 따스함을 일깨워준 것처럼.

탈혼밥 선언을 의식했을까. 윤 당선인은 대선 승리 이후 참모진 등과 연일 소탈한 식사를 즐겼다. 꼬리곰탕을 시작으로 짬뽕에 김치찌개, 파스타와 피자, 육개장 등으로 이어진 그의 탈혼밥 식사 정치는 대중의 관심을 끌 만했다. 이뿐인가. 반려견 ‘토리’를 데리고 한강공원을 산책했고 자택 지하 대중목욕탕을 이용했다. 같은 아파트 주민이 윤 당선인을 우연히 보고 ‘덩치 좀 있고 살이 뽀얀 분’이라는 목격담을 남겼는데, 탈혼밥에 탈권위까지 격의 없는 그의 스킨십 행보는 ‘정말 국민과 소통하는 진솔한 리더십이 등장하는 것인가’ 하는 희망마저 품게 했다.

하지만 기대가 컸다. 대통령 집무실의 용산 이전을 둘러싼 윤 당선인의 행보는 소통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청와대 시대를 끝내겠다는 그 취지야 백번 공감한다 해도 국방부와 합동참모본부 등이 연쇄적으로 이동하는 국가 중대사를 별다른 여론 수렴 없이 50여일 만에 해치우겠다는 발상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것은 마치 소통하겠다면서 탈혼밥을 외쳐 놓고 실은 ‘답정너’(답은 정해졌으니 너는 대답만 해야 한다)식의 회식을 하자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 같이 밥 먹자’며 불러 놓고 ‘넌 뭐 먹을래? 난 짜장면’이라고 하는 상사와의 식사에서는 대화와 설득을 가장한 지시와 복종만 있을 뿐이다.

김상기 콘텐츠퍼블리싱부장 kitti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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