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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사초롱] ‘5·18 北 개입’이라는 반지성주의

봉달호 작가·편의점주


누구든 인생에 가장 오랜 기억이 있다. 친구들과 골목에서 소꿉놀이하던 기억이라든지, 엄마 아빠 손 잡고 대공원에 갔던 희미한 추억이라든지, 동생이 태어난 날 흥성이던 풍경이라든지. 내게도 그런 기억이 있는데 그날 나는 동네 당산나무 아래 있었고, 멀리 신작로에 트럭에 탄 어른들이 기다란 막대기 같은 것을 흔들며 지나가던 광경을 또렷이 기억한다. 날짜도 가늠할 수 있다. 1980년 5월 21일 오후로 짐작한다. 태어나 5년7개월 되는 날이었다.

인생 첫 기억을 날짜까지 특정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풍경이기 때문이다. 그해 5월 21일 오전 계엄군이 총을 쏘며 학살을 자행하자 광주 시민들은 트럭에 나눠 타고 나주·화순 등 인근 도시로 흩어져 참상을 알렸고, 예비군 무기고 등을 열어 무장을 시작했다. 나주에서 광주로 들어오는 길목에 우리 집이 있었으니, 그날 내가 봤던 ‘기다란 막대기’는 아마 소총이었을 것이다. 트럭에 탄 사람들은 ‘시민군’으로 불렸다.

호남 사람들에게 5·18은 기나긴 숙제와 같은 이름이다. 내가 자랄 때 5·18은 금기에 가까운 단어였다. 누구든 소곤소곤 숨죽이며 그날을 속닥였다. 중학 시절에, 다른 도시의 또래들이 야한 잡지를 책상 아래로 주고받을 나이에 광주 아이들은 5·18 사진집을 몰래 돌려보며 눈을 질끈 감았다. 계엄군이 몽둥이를 휘두르던 건물 모퉁이는 내가 매일 지나는 길목에 있는 건물이 분명했고, 양복 입은 사람이 피 흘리며 끌려가는 거리의 보도블록은 금남로 지하상가 앞엣것이 분명했다. 그 자리에 우리 형제와 누이, 삼촌과 이모가 맞아 죽었다.

우리가 바란 건 남다른 대우를 해 달라는 것이 아니었다. 나라를 지켜야 할 군인이 왜 시민을 향해 총을 쏘았던 것이며, 그토록 무자비하게 진압했고, 오랜 시간 광주 시민들에게 폭도(暴徒)라는 누명을 씌웠냐는 것이다. 찾고 싶은 건 명예였고, 듣고 싶은 말은 진실한 사과였다.

며칠 전 윤석열 대통령이 5·18 기념식에 참석했다. 여당 국회의원들까지 모두 데리고 갔다. 보수 정당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참석자들과 손잡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그런 일이 뭐가 그리 어려웠을까, 왜 그토록 오래 걸렸을까 하는 섭섭함도 있지만 지난 일은 잊자. 벌떡 일어나 박수 쳐 주고 싶을 정도로 잘한 일이다. “자유와 정의 그리고 진실을 사랑하는 우리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광주 시민입니다”라는 연설 내용도 감동이었다.

그러면서 또 하나 아쉬움은 남는다. 아직도 5·18을 폭동이라 말하고, 북한군이 잠입해 시민군으로 행세했다는 ‘반지성주의’에 환호하며, 그런 사람을 “존경하는 박사님”이라 칭하면서 공청회까지 열었던 정당이 있다. 그 정당이 바로 대통령이 속한 정당의 전신이다. 물론 대통령의 생각은 그들과 다르고, 지금 그 정당은 많이 달라졌다고 하지만, 당시 공청회를 주최한 사람이 이번 지방선거에 광역단체장으로 출마한 참담한 풍경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러니 광주 사람들은 여전히 ‘그 정당은 변하지 않았다’ 회의하는 것이며, 광주의 아픔에 연대 의식을 갖는 세대들도 함께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나는 5월의 진실이 이른바 ‘왜곡처벌법’ 같은 해괴한 법으로 바로 세워진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진실에 벗어난 말을 강제로 차단해 진실만 말하도록 만드는 세상은 5월 영령이 바랐던 세상의 본령이 아닐 것이다. 어쨌든 그것도 사상의 자유시장에서 스러지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자기 내부의 ‘반지성’에 냉철한 잣대를 들이댈 때, 우리는 특정 정당과 진영에 닫았던 마음을 차츰 열게 되리라. 대통령의 광주 방문이 일회성으로 끝나지는 않으리라 믿는다. 쉬운 길을 너무 오래 돌아왔다.

봉달호 작가·편의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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