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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사니] 끼리끼리는 ‘과학’이다

이용상 산업부 차장


철수(가명·40)씨는 휴가 때마다 하루는 일정을 비우고 인생 계획을 세운다. 20대 때부터 한 해도 거른 적이 없다고 한다. 1년, 3년, 5년, 10년 후 되고자 하는 모습을 상상한 뒤 이를 달성하기 위한 로드맵을 짜는 것이다. 최근 종영한 화제작 ‘나의 해방일지’에서 삼남매(염기정, 염창희, 염미정)의 아버지 염제호가 좋아했을 만한 아들상이겠다. 드라마에는 염제호가 아들 염창희를 호통하는 장면이 나온다(이 글엔 나의 해방일지 스포일러가 3차례 있다).

“긴 세월을 아무런 계획 없이 살 거야?” 염창희가 대꾸한다. “저는 애들한테 꿈이 뭐냐고 묻는 게 제일 싫어요. 꿈이 어디 있어? 수능 점수에 맞춰 사는 거지. 수능이 320점인데 그거 갖고 뭐 의대에 갈 거야, 뭐 할 거야?” “아무 계획이 없이 사니까 그런 거 아냐!” “그러는 아버지는 인생을 계획한 대로 사셨습니까!”

염제호는 대꾸하지 못했다. 철수씨의 인생도 계획한 대로 흐른 적은 거의 없다. 그래도 철수씨의 인생계획론은 확고하다. 그래야 되는 대로 살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인생 계획을 짜는 첫 단계로 그가 소중히 여기는 것, 지금 당장 행복을 주는 것들을 적어 내려간다. 신앙, 가족, 아늑한 공간, 강아지, 식스팩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6~7개 정도는 술술 떠오르는데 그다음부터는 머리를 쥐어짜야 목록을 채울 수 있다. 철수씨의 인생 계획은 이 몇 안 되는 행복을 손에 쥐기 위한 여정이다. 그중 하나가 바로 오랜 친구다.

적잖은 사람은 일보다 관계에 지쳐있다. 맞지 않는 인간과 시간을 보내는 건 몹시 곤혹스럽다. 나의 해방일지에 등장하는 해방클럽 3인방(염미정, 조태훈, 박상민)이 그랬다. 그들은 회사가 직원들에게 동호회 가입을 강요하자, 어디에 갇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뭔가로부터 해방하고 싶다며 해방클럽 동호회를 만들었다. 특히 박상민은 불편한 인간과의 불편한 관계를 강요하는 회사에 강한 불만을 표출한다. “아니, 왜 밥 먹는 시간까지 사람 부담스럽게 하는 거야! 내가 회사 전 직원 다 알아야 돼? 다른 부서 사람들이랑 친하게 지내서 뭐 하려고? 내 부서 인간들도 힘든 판에. 학교 때 오락부장들만 모아 놨나? 동호회 드나 봐라!”

그래서 인간은 모름지기 본인과 비슷한 성향의 친구나 동료에게 끌리기 마련이다. 유난히 일하기 싫은 날에도 관심사가 같거나 성격이 잘 통하는 이를 만나면 숨통이 트이고, 좋아하는 책이나 취미를 공유하며 에너지를 얻기도 한다. 그래서 철수씨는 요즘 부쩍 이런 생각을 많이 한다고 한다.

‘굳이 불편한 관계를 억지로 끌고 가려 애쓰지 말자. 그래야 내 행복 수치가 높아진다. 맞지 않는 사람과 얽히지 말고 그냥 잘 맞는 사람과 끼리끼리 살자.’

최근 만난 한 재계 관계자로부터 재벌 3세들의 모임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평범한 가정과는 다른 환경, 교육, 부담감 같은 것들을 경험하며 성장했을 그들은 그들만의 모임을 통해 동질감 같은 걸 느꼈을 거다. 그런데 갑질로 유명한 A그룹의 3세가 그 모임에서도 유난을 떨었던 모양인지 왕따 취급을 당하고 있다고 했다. 결국 같은 부류만 남는다. 아까 ‘아버지에게 아버지는 인생을 계획대로 사셨냐’고 따졌던 염창희는 이런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회사 옆자리 선배로 인한 괴로운 감정의 화살을 본인에게 돌렸다. “나도 좀 나이스하고 양반 같은 인간들이랑 일하고 싶어. 근데 왜 못 그러냐? 내가 양반이 아니라는 거지. 왜? 끼리끼리는 과학이니까. 쓰리지만 내 수준이 여기라는 거. 그래서 늘 ‘양반 되자’, ‘저 인간이 양반 되길 바라지 말고 내가 양반 되자’ 득도한다 내가.” 끼리끼리는 과학이다.

이렇게 과학적 절차를 거쳐 남은 친구·동료들과 힘들고 지친 세상 버텨가는 게 그의 인생 계획 중 하나다. 그게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한 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뉴스를 보면 끼리끼리 다 해 먹으면서 이게 다 너희를 위한 거라고, 조직을 위한 거라고, 국민을 위한 거라고 얘기하는 사람들이 자꾸 등장해 철수씨는 좀 많이 거북하다고 했다.

이용상 산업부 차장 sotong203@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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