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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 개미굴

김철오 온라인뉴스부 기자


경기도 수원에 홀로 사는 최홍식(가명·74)씨는 외출할 때마다 정장에 넥타이를 반듯하게 매는 노신사다. 20년 전 지병으로 쓰러진 아내는 병상에서 1년을 넘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당시 최씨는 병원비를 내고 1000만원 남짓 남은 보험금 잔액을 차마 쓸 수 없어 예금 통장에 넣어뒀다.

이 통장을 열어본 건 15년쯤 뒤인 70세에 이르러서였다. 적막에 익숙해지던 2018년 어느 날 종종 들려오는 주식시장 얘기가 최씨의 감각을 깨웠다. 최씨는 모처럼 책 대신 신문을 펼쳤고, 경제방송을 찾아 유튜브와 팟캐스트를 구독하는 법을 배웠다.

최씨의 눈에 들어온 건 전기차, 그중에서도 당시 부도 위기에서 막 벗어난 미국 스타트업 테슬라였다. 이제는 나스닥 시가총액 5위로 올라선 전기차 시장의 주도주, 뉴욕증시에서 한국인의 사랑을 독식하는 바로 그 테슬라를 4년이나 투자했으면 지금의 시세로 어림잡아도 최씨 수익률은 1000%를 넘겼을 게 분명하다.

이런 최씨에게 진짜 기쁨을 안긴 건 단절된 줄 알았던 세상과의 대화였다. 최씨는 주식 관련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에서 50여명과 소통하는 종목토론방(종토방)을 개설하고 하루 너덧 건씩 들어오는 질문에 답하는 일을 낙으로 삼는다. 대화를 이어가기 위한 공부가 최씨 일상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최씨는 “그저 운이 좋았다”고 했다.

서울 은평구에서 부모의 가게 일을 돕는 김우영(가명·31)씨는 원래 예술고등학교를 졸업한 배우 지망생이었다. 이리저리 원서를 넣어도 서류 심사를 통과하지 못했고, 오디션 기회를 얻어도 떨어지기 일쑤였다. 20대 내내 실패한 경험만 쌓아가던 그에게 부모는 변함없이 “기죽지 말라”고 응원했다.

김씨는 만 30세를 맞이한 2020년 생일에 배우의 꿈을 접고 부모의 가게로 출근했다. 최저시급에서 4분의 1만 받고 꼬박 1년을 일하니 150만원을 손에 쥐었다. 김씨가 새로운 기회를 찾은 곳은 주식시장이었다.

하지만 김씨는 지난해 주식시장으로 뛰어든 다른 ‘개미’들과 별반 다를 게 없었다. 그해 코스닥 종목 위주로 150만원을 투자해 손실을 냈고, 남은 자금을 올해 미국 주식 계좌로 옮겨 SNS 1등 기업 메타 플랫폼스(옛 페이스북)를 사들였다가 ‘어닝 쇼크’에 휩쓸렸다. 김씨의 원금은 반의반 토막이 났다. 김씨가 투자금과 함께 잃어버린 건 자신감이다. 여전히 젊고, 부모의 일을 도와 건강하게 살아가는 김씨가 유독 주식 얘기만 나오면 “내겐 운도, 재능도 없다”며 자신을 탓했다.

여윳돈으로 손실을 본 김씨의 형편은 택배기사 황미진(가명·36)씨와 비교하면 나은 편에 속한다. 20대에 중소기업 사무직으로 일했던 황씨는 30대로 넘어오면서 ‘배달 열풍’을 좇아 라이더부터 택배기사까지 근거리 배송이라면 가리지 않고 달려들었다.

올해 코로나19 확진자가 감소하고 방역의 문턱이 낮아진 ‘리오프닝’에서 황씨는 배달 시장의 침체를 단박에 알아챘다. 사람 중심에서 도심항공교통(UAM)과 자율주행으로 재편될 배달 시장의 미래가 황씨의 눈앞에 그려졌다. 의사결정이 빠른 황씨는 마이너스통장을 개설하고 국내외 성장주 여럿에 투자했다.

그게 패착이었다. 황씨는 올해 나스닥의 약세장에 휘말려 손실만 입고 매월 4% 넘는 은행 이자를 물어주고 있다. 내년이면 경기 침체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데, 황씨의 주식 계좌는 이미 ‘금융 위기’에 들어갔다.

지난해 10월부터 8개월간 매일같이 뉴욕증시 시황 기사를 쓰면서 지수나 주가에 사람 냄새를 입혀볼 생각으로 100여 종목의 종토방과 커뮤니티를 돌아다니며 ‘개미’들을 관찰했다. 그 ‘개미굴’ 같은 종토방에서 가끔 대화를 주고받으니 최씨, 김씨, 황씨처럼 자신의 얘기를 선뜻 들려주는 ‘개미’가 나타났다. 저마다 다른 삶을 살아온 이들이 ‘개미굴’로 들어와 한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꿈이다. 하지만 긴축을 시작한 시장은 이제 단잠에서 깨어날 시간이라고 재촉한다.

한국예탁결제원 증권정보포털의 해외 주식 종목별 거래량 월간 집계에서 지난해와 올해 부동의 1위는 테슬라다. 시선을 끄는 건 지난달부터 새롭게 등장한 2~3위다. 애플이나 엔비디아 같은 업종별 우량주가 나스닥지수 추종(TQQQ), 혹은 역방향(SQQQ) 3배짜리 ETF로 바뀌었다. 시간을 3배속으로 되돌리고 싶을 만큼 ‘개미’들의 마음은 급하다. 이들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는 않아 보인다.


김철오 온라인뉴스부 기자 kcopd@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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