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시사 > 전체기사

[내일을 열며] 끝나지 않는 ‘석유의 시대’

신창호 국제부 선임기자


전 세계가 스태그플레이션 공포에 휩싸여 있다. 각국 증시가 폭락하고 소비시장이 얼어붙는 모양새다. 세계 경제를 주도하는 미국 중심의 서방 선진국들은 인플레를 잡기 위해 속속 기준금리를 인상하고 있다. 직접적으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시작된 원자재·식량 부족 사태와 공급망 고갈에 따른 결과이지만 이 모든 혼란의 뒤에는 석유가 도사리고 있다.

국제 유가가 오르기 시작하던 지난해 초만 해도 어떤 경제전문가도 지금 같은 공포를 걱정하지 않았다. 자동차시장이 화석연료 엔진 차량에서 전기차로 빠르게 재편될 것이란 분석 때문이었다. 기름을 넣어야 달릴 수 있는 엔진 차량은 최근 몇 년간 퇴물 취급을 받았다. 훨씬 간단한 전기모터와 희토류·니켈 등을 쓰는 전기배터리만 잘 만들면 수만개 부품을 가진 현재의 ‘기름차’를 대신할 ‘전기차’가 쉽게 만들어지고, 이런 전기차가 수억대의 전 세계 자동차를 대체할 것이란 희망이 그때만 해도 ‘희망’ 아닌 ‘현실’로 여겨졌다.

그래서 석유 가격이 올라도 선진국 경제는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의 파리협정 재가입을 필두로 친환경 경제성장 전략 짜기에 올인했다. 중동 산유국들은 코로나19 사태로 급격하게 떨어진 석유 수요에다 선진국들의 친환경 드라이브에 생산량 감축을 거듭했다. 그런데 지난 2월 말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지면서 사태는 180도 바뀌어버렸다. 그렇게 퇴물 취급을 받았던 석유의 위력이 얼마나 큰 것인지가 한순간에 확인됐기 때문이다.

유럽연합(EU) 중심국가 독일의 경제는 러시아산 천연가스 수입을 끊자 엉망으로 엉켜버렸다. 환경 공해를 야기한다는 이유로 30년간 탈원전 정책을 밀어붙였던 독일은 천연가스로 돌아가는 발전소마저 가동 중단 위기를 맞자 100년 된 동북부 광산에서 석탄을 캐내 발전소를 돌리게 됐다. 전기 공급을 엄청난 탄소를 배출하는 석탄 화력발전소에 의존하게 된 셈이다. 전기차 장려 정책도 독일에선 지금 온데간데없다. 영국 프랑스 등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사정이 더 열악해 보인다. 값싼 석유에 익숙한 미국 소비자들은 갤런당 휘발유 가격이 5달러에 육박하자 아예 바이든 행정부에 대한 불신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유가가 급등하자 소비자물가는 1970년대 석유 파동 이후 최대의 상승폭을 기록하기도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최근 중동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아라비아를 직접 방문해 석유 증산을 간청했다. 얼마 전까지도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의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암살 의혹을 문제 삼아 사우디를 견제하던 그가 얼마나 급하게 됐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와중에 러시아산 석유를 헐값에 대량으로 사들일 수 있게 된 중국과 인도는 반대급부를 향유하고 있다. 이참에 필요한 양보다 훨씬 많은 러시아산 석유를 구입해 비축까지 해놓는다. 러시아가 비록 헐값이지만 중국과 인도에 석유를 팔아치울 수 있다는 것은 우크라이나 전쟁에 투입할 수 있는 전쟁 비용을 지속적으로 마련할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겪으며 세계인들은 새삼 석유의 위력을 실감하고 있다. 전기차 선풍으로 20세기 잔재인 석유의 시대가 사라질 것이라 여겼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석유 가격이 오르면 다른 모든 상품의 가격이 오르고, 보통 사람의 삶 자체가 휘청이는 일을 직접 당하고 있다.

또 하나 덤은 전기차에 대한 자각이다. 전기가 친환경 에너지원에 의해서가 아니라 석유·석탄 같은 화석연료를 땔감 삼아 생산되는 한 아무리 전기차가 많아져도 석유의 시대는 끝나기 힘들다는 사실 말이다.

신창호 국제부 선임기자 procol@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