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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창일 기자의 미션 라떼] 다시는 싸우지 말자 “샬롬”

‘탄피 십자가’에 대한 단상

서울 중구 배재학당역사박물관 벽면에 6·25전쟁 때 생긴 탄흔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1950년 9월 18일 미국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상륙 부대가 북한군 손에 떨어진 인천을 탈환했다. 우리가 아는 인천상륙작전의 시작이다. 이날부터 한국 해병대와 미 제1해병사단과 육군 7사단 등은 서울로 힘겨운 진격을 시작했다.

북한군은 도심 곳곳에 몸을 숨긴 채 쉬지 않고 도발했다. 피할 수 없던 시가전은 치열하게 전개됐다. 전투에 전투를 거듭한 군대는 경인가도와 영등포, 김포비행장 등 수많은 전략 거점을 탈환한 뒤 드디어 한강 도강을 목전에 뒀다.

막으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 사이의 전투에서 승기는 한국군과 미군이 쥐었다. 20일 양국 해병은 한강 북쪽에 진을 친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을 뚫고 강변으로 상륙하는 데 성공했다. 한강 북쪽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는 더욱 치열했다. 모든 곳이 격전지로 변해 어느 곳 하나 쉽게 뺏을 수 없었다. 지금의 마포구와 서대문구 곳곳에서 벌어진 시가전이 특히 치열했다.

양국 부대는 연희동과 마포, 남산 등 3개 방면으로 나눠 도심을 포위하며 서울 종로구의 중앙청을 향했다. 양국 군이 서울 시내 중심부에 도착한 게 26일이었다.

전진은 더뎠지만 승리의 순간은 점점 가까워졌다. 27일 새벽, 한국 해병대 제6중대 1소대는 중앙청에 태극기를 게양하기 위해 선봉에 섰다. 소대장 박정모 소위를 비롯한 장병들은 마침내 중앙청 옥상에 태극기를 걸었다. 이튿날 마침내 3개월간 북한군 수중에 있던 서울을 수복했다.

전통적으로 시가전은 개활지에서 벌어지는 전투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난이도가 높다. 아군과 적군이 민간인을 사이에 두고 전투를 벌여야 하는 건 물론이고 양측 모두 매복할 곳이 너무 많은 것도 난제다. 건물 잔해에 몸을 숨긴 저격병 한 명 때문에 중대 전체가 온종일 고립되기도 일쑤다.

인천상륙작전 후 서울을 수복하기까지 몸을 숨길 수 있는 모든 곳에서 전투가 벌어졌던 이유다. 그 흔적은 7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고스란히 남아 당시 전투를 증언하고 있다.

서울 도심으로 향하는 관문과도 같았던 서울 마포구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의 탄흔이 대표적이다. 화강암과 대리석으로 만든 묘비들은 움푹 팬 전투의 흔적을 적잖게 품고 있다. 큰 묘비일수록 탄흔이 많다. 몸을 숨기기 좋았기 때문이다.

새문안교회 마당에 있는 HG 언더우드 선교사 기념비의 탄흔.

서울 종로구 새문안교회 앞에 있는 HG 언더우드(1859~1916) 선교사 기념비도 총알을 피하지 못했다. 새문안교회를 설립한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25년 신앙의 후배들이 세운 기념비다.

서울 중구 배재학당역사박물관에도 수많은 탄흔이 있다. 현재 박물관으로 사용되는 배재학당 건물 전면에는 수십 발의 탄흔을 시멘트로 메꾼 흔적이 있다. 1층 오른쪽 창문 주변에 집중된 탄흔을 통해 당시 이 건물을 차지하기 위해 벌어졌던 격전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전쟁의 흔적이 남긴 역사의 교훈은 뭘까. 스위스 제네바 세계교회협의회(WCC) 로비의 기념품점에는 전 세계 전쟁터에서 수거한 탄피로 각국 목회자들이 만든 ‘탄피 십자가’가 전시돼 있다. 관광객들에게 판매도 하는 이 십자가가 주는 교훈은 묵직하다.

누군가의 몸에, 어떤 건물에 박혔을 총알을 뱉어낸 탄피가 십자가로 변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있어서다. 탄피를 펴고 두드려 십자가를 만든 목회자들의 마음을 헤아려 본다. 오는 27일은 휴전 협정 69주년을 기념하는 날이다. 전쟁이 남긴 탄흔은 다시는 싸우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오직 평화’.


글·사진=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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