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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온의 소리] 세상의 중심은 어디인가


냉전시대 동유럽, 악명 높은 공포정치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몇몇 사람이 거리에 모였다. 그러고는 정권의 탄압을 받는 작가를 지지하는 시위를 갑작스레 시작했다. 어디서 비밀경찰이 현장을 지켜볼지 모르는지라, 대중은 시위대의 외침에 귀를 닫고 갈 길을 가기 바빴다. 시위대의 호소가 절절해질수록 행인들의 시선은 아래로 깔리고 발걸음은 빨라졌다.

시위대가 사람들로부터 점점 더 고립되던 중, 길을 가던 한 남자가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쭈뼛거리며 주위를 살피던 그는 돌아가 시위대에 악수를 청했다. 그 장면을 본 목격자는 마음에 차오르던 신비한 느낌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악수하던 손이 갑자기 세상의 중심이 된 것 같았다.”

영국의 소설가 아이리스 머독의 1971년 작 ‘우연적 인간’(An Accidental Man)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당시 동서로 나뉜 세계 질서는 굳어가는 것 같고, 체제 경쟁 때문에 인간 존엄은 무시당하고 전제정치의 공포에 사람들의 마음은 쪼그라져 있었다. 이처럼 폭력적이고 폐쇄적 세계에서 인간은 어떻게 희망하는 법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을까. 도덕철학자이기도 했던 머독은 시위대의 손을 잡아줬던 소심한 손에 시선을 둔다. 그곳이 얼음장 같은 날씨만큼이나 차가워진 사람들의 양심이 일깨워진 지점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폭력으로 정의된 세계의 논리에 균열이 일어났고, 그 틈을 통해 진선미의 가치로 채워진 세계가 드러났다.

지금껏 인류가 여러 위기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어두워진 마음을 밝히고, 의미로 충만한 세계를 갈망하게 하는 크고 작은 사건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전제정치에 맞선 시위대의 손을 꼭 잡았던 이름 모를 한 남자의 손과 같이, 현실의 논리에 길든 상상력을 새롭게 되살리는 그 무엇이 늘 있은 덕분이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일상 속에서 초월을 맛보게 해주는 평범한 계기를 놓치지 않고 응시할 수 있는 기술이 우리를 사람답게 해준다.

세상의 중심을 새롭게 보여주는 ‘혁명적’ 사건은 사실 혁명의 역사를 비껴간 경우가 많다. 이는 성경에서도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구약성경 사사기의 마지막 구절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그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삿 21:25) 왕의 부재에서 비롯한 혼란과 위기를 겪은 이스라엘은 다른 고대 근동 국가와 마찬가지로 왕을 세우면서 그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 이것이 우리가 흔히 아는 이스라엘의 역사이다.

하지만 구약성경이 지목한 세계의 중심은 왕정이라는 중앙권력 체제와는 거리가 먼 곳에 있었다. 사사기 마지막 구절에 이어 룻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룻 1:1) 정치와 경제적 위기 상황 속에서 벌어진 힘없는 소수자들의 이야기에서 이전에 알지 못하던 세상에 빛이 비쳐왔다. 타지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은 시어머니를 떠나지 않은 젊은 과부 룻의 헌신, 그리고 이방 여인을 친절히 대하고 보호했던 보아스의 환대는 은혜로 정의되는 세상의 중심이었다.

약한 자에 대한 환영과 타자의 존엄한 삶을 위한 헌신이 있는 자리가 중심이 되는 곳이 바로 우리가 갈망해야 할 세계이다. 반면 자기 능력을 키워서 스스로 세상의 중심이 되라는 환상을 불어넣는 현대사회는 사사기 마지막에 나오는 모두가 자기식대로 살던 혼란한 시대와 닮아 보인다. 물론 권력과 재물과 명예로 중심에 도달할 수 있는 세계가 있긴 하다. 그런데 복음서에 따르면 그곳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적하던 마귀의 세상이라는 점이 섬뜩하다.

김진혁 교수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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