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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윤의 딴생각] 바쁘다는 착각


어른이 된 이후 가장 많이 하는 말은 뭐니 뭐니 해도 바쁘다는 소리가 아닐까 싶다. 집에 좀 내려오라는 엄마의 잔소리에도 요즘 너무 바빠서 나중에. 술이나 한잔하자는 친구의 연락에도 바쁜 마감이 있어서 다음에. 귀하의 통장이 대포통장으로 이용되고 있어 지금 당장 수사에 착수해야 하니 주민등록번호를 대라는 무시무시한 전화에도 바빠서 끊을게요라고 대꾸하기 일쑤이니 말이다. 그렇게 하루하루 바쁘게 살아가던 어느 날, 한동네에 살고 있는 언니에게서 연락이 왔다. 언니를 만나면 안 그래도 바쁜 하루가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 버릴 것이 분명했기에 퇴짜를 놓으려 마음먹었건만, 유기견을 입양했으니 보러 오라는 한마디에 그만 무장 해제돼 버리고야 말았다.

오래간만에 만난 언니의 얼굴은 몰라보게 핼쑥해져 있었다. 개를 돌보는 일이 애를 키우는 것만큼이나 손이 많이 간다는 사실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힘들 줄은 미처 몰랐단다. 하루 세 번 산책을 시켜 주는데도 온종일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놀아 달라고 보채는 바람에 진이 다 빠진다며 죽는소리를 했다. 나는 그런 언니의 하소연을 들은 체 만 체하며 몰티즈의 복슬복슬한 털을 연신 쓰다듬었다. 녀석도 내가 자기를 예뻐한다는 걸 눈치챘는지 발라당 배를 까고 누워 기쁨의 브레이크 댄스를 췄다. “아니, 이렇게 귀여운 개를 왜 버렸는지 모르겠네.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데?” 하는 나의 물음에 곧 있으면 이유를 알게 될 거라는 한숨 섞인 대답이 돌아왔다.

잠시 후 퇴근 시간 무렵이 되자 녀석의 본색이 드러났다. 터덜터덜 계단을 오르내리는 소리에 왈왈! 띡띡띡 도어 록 비밀번호를 누르고 철커덕 현관문을 여닫는 소리에 멍멍! 부릉부릉 분주하게 오가는 배달 오토바이 소리에 으르렁 컹컹! 문틈 사이로 흘러들어오는 소리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나에게는 그저 일상적인 소리가 녀석에게는 위협적인 소음으로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마냥 귀엽기만 하던 녀석은 밤이 깊어질수록 맹견이 돼 가더니만 결국에는 현관문을 향해 악을 쓰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그마한 체구에서 어쩜 저리 큰 소리가 뿜어져 나올 수 있을까. 몰티즈의 탈을 뒤집어쓴 호랑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쉿, 조용! 아무도 너한테 집 지키라고 안 했어. 편히 있어, 편히!” 언니가 포효하는 녀석을 달래려 갖은 애를 썼으나 그야말로 ‘개 귀에 경 읽기’였다. 녀석은 시키지도 않은 보초병 행세를 하며 저녁 내내 현관문 근처를 서성이더니만 제풀에 지쳐 곯아떨어지고야 말았다. 그제야 평화를 찾은 언니가 퀭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난 쟤를 보면서 바쁘게 살 필요가 없다는 걸 느껴.” “그게 무슨 소리야?” “쟤 좀 봐. 집 지킨다고 세상 짐 혼자 다 짊어진 것처럼 안절부절못하잖아. 사람이라고 뭐 다르겠어? 우리가 중요하다고 여기면서 절절매고 있는 일이, 알고 보면 별 쓸데없는 일일지도 모른다는 말이야.”

그러게. 내가 하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엄마도 친구도 언니도 뒷전으로 미룬 채 매일매일 쫓기듯 살아가고 있을까. 시뻘건 눈으로 모니터를 노려보며 괴로움에 머리를 쥐어뜯고, 원고 진행 상황을 묻는 담당자의 전화에 신경질적으로 반응하고, 화풀이하듯 키보드를 두드리다 지쳐 침대 위로 쓰러지는 내 모습을 하늘에서 내려다본다면 얼마나 어쭙잖을까. 집 지키느라 안절부절못하는 저 개와 돈 번다고 절절매는 나는 하등 다를 바 없다고, 그러니 잘난 척은 이제 그만 집어치우고 바쁘다는 착각에서 빠져나오자고, 스스로를 애써 타일러 보았지만 불안한 마음이 깨끗이 가시지는 않았다.

“에고, 실컷 놀았네. 가야겠다.” 꾸벅꾸벅 졸던 녀석이 나의 목소리에 벌떡 일어나 이전보다 한층 현란한 브레이크 댄스를 선보였다. 산책가자는 말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나는 그런 개를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함께 산책을 나섰다. 바쁘지 않다. 바쁘지 않다. 나는 절대로 바쁘지 않다. 아니, 근데 이놈의 개는 걸음이 왜 이렇게 느려? 집에 가서 할 일이 태산이구먼! 나의 마음속에서 바쁘다는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녀석은 걸음을 멈추고 풀 냄새를 맡았다. 나는 그런 녀석을 기다리며 캄캄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 하나가 희미하게 깜빡이며 윙크를 보내고 있었다. 그래, 바로 그거야. 잘하고 있어! 귀여운 응원을 보내 주는 것 같았다.

이주윤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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