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지면옥 다음은 우리” 재개발 바람, 씁쓸한 ‘힙지로’

골목마다 점포 이전 안내 게시물
‘최고참’ 뮌헨호프도 연내 이삿짐
손님 “사라져 가는 가게들 아쉬워”

29일 오후 서울 중구 을지로 노가리 골목의 옛 초원호프 매장을 찾은 손님이 매장 이전을 알리는 안내문을 들여다보고 있다.

29일 오후 서울지하철 3호선 을지로3가역 인근 ‘노가리 골목’은 소나기만 오락가락할 뿐 한산했다. 재개발 공사 시점이 다가오면서 공실이 늘어난 이곳은 골목마다 점포 이전 소식을 알리는 게시물이 붙어 있었다.

서울 중구 을지로동주민센터 옆에서 작은 호프집을 운영하는 마진숙(57)씨는 “일찌감치 옮겨 간 가게들이 차라리 부럽다”고 씁쓸해했다. 2003년부터 건축자재 매장을 운영해온 그는 재작년 초 점포를 호프집으로 꾸며 노가리 골목 유행에 가세했다. 하지만 얼마 뒤 시작된 코로나19 유행 탓에 호프집에는 2년이 넘도록 손님 발길이 뜸했다.

그러던 지난 2월 건물주가 건물을 예고 없이 재개발 시행사에 매각했다. 곧 퇴거 요청이 날아왔다. 마씨 가게가 있는 지역은 을지로3가 도시정비형재개발구역 제12지구에 포함돼 내년부터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갈 예정이다. 시행사는 마씨에게 “오는 8월 내로 매장을 비워 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가게를 옮기는 건 쉽지 않은 상황이다. 옮겨 갈 만한 인근 상권은 이미 앞선 ‘피난 행렬’로 임대료가 치솟은 상태다. 그는 “오래 버티기는 어렵겠다고 체념하고 있다”며 “먼저 나간 가게들은 장사 잘하다 새 자리를 찾아 나갔는데, 이제는 옮긴 가게들로 꽉 차서 근처에 들어갈 곳도 없다”고 한탄했다. 그는 퇴거 뒤 다시 호프집을 차리지 않고 건축자재 매장만 온라인으로 운영할 예정이다.

앞서 을지로 대표 노포로 꼽히는 을지면옥은 세운재정비촉진지구 3-2구역 재개발 사업에 포함돼 3년간의 법정 다툼 끝에 지난 25일 마지막 영업을 했다. 충무로 맞은편의 노가리 골목에서 1989년부터 33년간 영업 중인 이 골목의 ‘현역 최고참’ 뮌헨호프도 내년 착공하는 수표구역 도시정비형 재개발사업구역에 들어가 이전을 준비해야 하는 처지다. 뮌헨호프 사장 정규호(79)씨는 “아직 보상 협의가 끝나지 않았다”면서도 “올해 안에 저기(을지로) 너머로 옮겨 영업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정씨는 예전 같은 노포인 전주집, 동원집, 을지OB베어 주인들과 술잔을 기울이던 시절이 그립다고 했다. 그는 “지금은 다들 떠나고 우리만 남았다”며 “을지면옥도 옮겼고 다음은 우리 차례”라고 덤덤하게 말했다.

손님들은 사라지는 가게들을 보며 아쉬워했다. 아내와 함께 모처럼 단골 가게인 초원호프를 찾아온 이주한(70)씨는 매장 입구에 붙은 이전 안내문을 보고 허탈해했다. 초원호프는 이달 초 걸어서 6분 정도 떨어진 을지로 ‘골뱅이 골목’으로 이전했다. 이씨는 “야외에서 먹는 특유의 분위기가 좋았는데 아쉽다”며 안내문 앞을 한참 떠나지 못했다.

폐점 날짜를 착각해 뒤늦게 을지면옥을 찾았다는 남경태(69)씨는 “없어지기 전 먹어보고 싶어 경기도 가평에서 먼 길을 왔다”며 “다른 곳에 다시 열어도 예전의 전통이나 분위기는 달라질 수 있어 아쉽다”고 말했다.

재개발이 시작돼도 같은 자리에 머무를 수 있게 된 수표구역의 공구상가 상인들은 “그나마 다행”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곳 상인들은 공사 기간 임시상가에 들어가 영업을 이어가고, 완공 후에는 공공임대산업시설에 나란히 입주할 예정이다. 조카와 함께 공구상점을 운영하는 김용선(65)씨는 “공구 상가는 아무래도 같이 붙어 있어야 장사가 된다”며 “재개발이 돼도 흩어지지 않게 돼 불행 중 다행”이라고 말했다.

글·사진=이의재 기자 sentin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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