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

시사 > 전체기사

[데스크시각] 감성 파괴의 시대

김상기 콘텐츠퍼블리싱부장


지금 한 장의 사진을 보고 있다. 미국 하버드대에 다니는 켈리라는 여학생이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교정 한편에서 우비를 쓴 채 따뜻한 수프를 한술 뜨는 장면이 담겨 있다. 2007년 5월 11일 촬영됐는데 여학생 표정이 어찌나 생생한지 좀처럼 눈을 뗄 수가 없다. 마치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수프를 맛보았다는 듯 깜짝 놀라는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하고 얼굴에는 벅찬 감격과 환희가 묻어난다.

켈리는 하버드대 경비원의 저임금 등에 항의하며 8명의 다른 학생들과 9일간 단식 투쟁을 벌였다. 세계 최고 지성들이 벌인 일이어서 그랬는지 투쟁은 이슈가 됐다. 지역 정치인과 유명 인사까지 학교를 찾아와 경비원 처우 개선을 압박했다. 결국 경비원들이 적절한 임금과 복지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논의하기 위한 위원회를 구성하겠다고 대학이 약속했다. 이어 경비원들이 나서서 학생들에게 단식을 그만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단식 투쟁이 일단락됐다. 곡기를 끊은 켈리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진 바로 그 수프는 경비원이 직접 끓여왔다. 하버드생들의 단식은 내 일이 아닌데도 적극적으로 약자의 편에 서서 사회정의를 구현한 모범 사례로 회자됐다.

2011년 비슷한 일이 우리나라 홍익대에서 벌어졌다. 대학 청소·경비 노동자 170명이 노조 설립 과정에서 기습 해고됐다. 대학이 용역업체와 계약을 해지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노동자들은 본관을 점거하고 무려 49일간 농성을 벌였다. 파견근로자 문제였고, 대학도 학생도 모두 피해를 보았다. 그래도 학생들은 기꺼이 노동자 편에 섰다. 당시 총학생회는 ‘열악한 여건에도 학생들을 위해 고생해준 청소·경비 노동자들을 지지하며 앞장서서 이들을 돕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그런데 소수 학생의 행동이 도마에 올랐다. 청소 노동자들의 집회 현장을 찾아가 ‘시끄러워서 공부에 방해된다’고 항의하는 사진이 공개됐다. 나이 지긋하고 추레한 노동자들 앞에 선 청년들은 멀끔하고 덩치가 컸다. 그러니 전후 사정이야 어떻든 사진으로는 청년들이 군림하는 강자요, 청소부들이 핍박받는 약자로 비쳤다. SNS에는 홍익대와 하버드대 학생들의 사진을 비교하며 극과 극이라는 비판이 이어졌다. 하버드대생들은 약자를 배려하며 정의를 실현한 ‘행동하는 지성’이고 홍대생들은 공감할 줄 모르는 ‘이기주의자’라는 비난이 쇄도했다. 누구는 청소 노동자들이 ‘학생, 우리가 치워주지 못해 미안해’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있었다고 전했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는 건학 이념을 지키지 못한 후배들이 부끄럽다는 플래카드가 교정에 내걸릴 정도였다. 가히 ‘공감의 시대’였다.

10여년이 다시 지나 비슷한 일이 연세대에서 벌어졌다. 이 학교 학생 셋이 청소·경비 노동자의 집회 소음으로 수업권을 침해당했다며 경찰에 고소했다. 이들은 또 수업료와 정신적 손해배상 및 진료비 등 638만여원을 지급하라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예전 같으면 약자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한다며 학생들을 힐난하는 여론이 높았겠지만 놀랍게도 이제는 아니다. 인터넷 기사 댓글에도 커뮤니티 관련 글에도 학생을 두둔하는 의견이 훨씬 많다. 노동자들이 신고도 하지 않고 학생들이 공부하는 도서관 등에서 집단행동을 한 게 과연 옳으냐는 날 선 지적이다.

시대가 변했다. 대학 나오면 으레 취직하고 결혼해 내 집 마련하던 낭만의 시대는 일찌감치 끝났다. 학교 식당도 부담돼 편의점 도시락으로 끼니 때우는 ‘N포’ 청년들에게 청소 노동자 시위는 공감의 대상이 아닌 수업을 방해하는 타도의 대상일 뿐이다. 감성 파괴의 시대에선 이게 상식이고 흔한 일이라 생각하니 씁쓸하다.

김상기 콘텐츠퍼블리싱부장 kitting@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