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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리사니] 사랑의 조건

조효석 사회부 기자


늦은 밤 아파트 복도. 상대를 집에 데려다주느라 함께 걷던 연인이 문득 멈춰 선다. 잠깐의 대화가 오간 뒤 정적이 흐르고, 어느 순간 한 입술이 다른 이의 입술 위에 포개진다. 때를 맞춘 듯 아파트 복도의 불이 꺼진다. 두 사람은 어둠 속에서 첫 입맞춤을 이어간다. 여느 멜로 혹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서 볼 법한 장면이다.

당사자가 누군지에 따라 시선은 달라진다. 주인공이 자폐스펙트럼 장애인인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장면이 그랬다. 잘생기고 배려심 많은 상대와 사랑에 빠지고, 결국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평범한 연애의 모습이지만 현실에서 비슷한 일을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그가 장애인이라는 조건 때문이다.

또 다른 장면. 막 연인이 된 두 남녀가 길을 걷는다. 둘은 바닷가 광장에서 건반을 연주하는 악사를 마주친다. 여자가 춤을 좋아하는 걸 기억해낸 남자는 함께 춤추길 권한다. 두 사람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선율에 맞춰 몸을 움직인다. 도대체 무슨 동작인지도 모를 춤이 이어지지만, 둘은 내내 얼굴 가득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이 장면이 등장한 호주 ABC 방송의 프로그램 ‘러브 온더 스펙트럼(Love on the Spectrum)’ 역시 자폐스펙트럼 장애인의 사랑을 다룬다. 차이가 있다면 허구 섞인 드라마가 아니라 일반인이 등장하는 리얼리티 쇼라는 점이다. 연애에 익숙하지 않은 이가 많다는 점 정도를 빼면 출연자들의 모습은 여느 연인과 다르지 않다.

사랑에는 항상 조건이 따른다. 우리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코로나19에, 치솟는 물가에, 바쁜 일과에 많은 이가 종종 결혼은커녕 연애마저 포기한다. 직장과 집, 학벌 등 물질로 재단되고 평가받기 일쑤인 한국 사회의 일상은 언제나 전쟁터다. 전쟁터에서도 꽃피우는 게 사랑이라지만, 전쟁이 일상인 사회에서라면 사랑은 찾기 힘들다.

이런 사회에서는 사랑의 주체가 사회경제적 약자일수록 조건이 더 가혹하다. 우리가 화면 속 우영우의 사랑을 보며 허무맹랑함마저 느꼈다면, 그것은 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장애인이 사회로 나와 일상생활을 하거나 자유로이 사람을 만나는 것조차 상상이 어려운 사회에서 우영우의 예쁜 연애는 드라마로만 남는다.

허구를 동원하고서야 장애인의 사랑을 아름답게 그려내는 우리 사회보다 ‘러브 온더 스펙트럼’ 속 장애인들의 연애는 손에 잡히는 현실이다. 그들 역시 비장애인에 비해 연애가 낯설지만, 서툴게나마 관계 맺기를 해나가는 법을 알고 있다. 상대의 감정을 살피고 배려하는 일도, 내 장애를 상대에게 설명하는 일도 비교적 능숙하다.

두 모습의 차이는 우리가 그들에게 안긴 조건에서 비롯한다. 발달장애인 대상 성교육을 하는 전문가는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들은 관계 맺기를 연습할 기회조차 드물다”고 말했다. 그는 비장애인 틈에 섞여 함께 웃고 때로 화내며 자연스레 관계를 익힐 여지조차 주지 않는 게 우리 사회라 했다. 같은 이유로 비장애인들이 장애인을 향해 쌓아나가는 편견 역시 그들이 사랑할 때 감내해야 할 악조건이다.

철학자 한병철은 저서 ‘에로스의 종말’에서 사랑이 종말에 이른 이유를 현대사회의 ‘동일성’에서 찾는다. 상대의 모든 것이 물질로 동일하게 재단되는 사회에선 타자에 대한 환상도, 그로 인해 꽃피울 사랑도 어렵다. 장애의 문제도 다르지 않다. 누군가를 장애인으로만 보거나 그 때문에 현격한 빈곤과 짧은 기대수명, 형편없는 이동권 등 가혹한 현실을 강요하는 곳은 ‘비장애’라는 동일성에 함몰된 사회다.

개인은 그 사회의 한계에서 자유롭지 않다. 유독 장애인에게 사랑이 더 어렵고, 허구로 보일 만큼이나 드물다면 그건 각 장애인의 문제가 아니라 이 사회의 숙제다. 우영우의 사랑이 드라마 속 판타지가 아니라 현실에 남게 하려면 그들이 장애를 이유로 멀어지지 않게, 소외당하지 않도록 하는 게 우선 조건이다.

조효석 사회부 기자 promen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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