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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화에 밀리고 왜색 오해받고… 채색화의 재평가

국현 과천관 ‘생의 찬미’ 특별전
궁중화에서 민화, 미디어아트까지
현대미술의 고답적 경계 허물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채색화 특별전: 생의 찬미’는 채색화가 ‘길상’ ‘기록’ 등 기능적 역할을 했다는 점에 주목했다. 채색화의 기본 개념 정의에 충실해야 한다는 지적이 일부 제기되지만 역할에 방점을 찍음으로써 전통 회화에서 영상까지 다기한 장르를 품는 전시가 됐다. 스톤 존스턴의 영상 작품 ‘승화’.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의 ‘생의 찬미’전 전시장의 들머리에서 관객을 맞이하는 작품은 스톤 존스턴의 영상 작품 ‘승화’다. 역신을 쫓는다는 신라 향가의 주인공 처용으로 분한 국립무용단의 무용수가 춤추는 장면이 나오는데, 배경 음악이 국악이 아닌 서양 음악이다. 그런데도 절묘하게 어울린다.

국립현대미술관 최초의 채색화전을 표방하는 전시장 입구에 외국 작가의 작품이 나와 당혹스러울 수 있겠다. 하지만 채색화 그 자체, 즉 개념이나 계보 정리가 아니라 채색화의 역할에 주목했다는 기획 취지를 듣고 나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조선시대 채색화는 선비들이 정신 수양이나 취미로 그리던 흑백의 문인 수묵화에 대별된다. 궁중회화든, 여염집에 걸리든, 화원이 그린 것이든, 무명 화가가 그린 민화든 채색화는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벽사), 장수 출세 부귀 등 복을 부르고(길상), 집안을 장식하는 등 목적이 있었다. 까치호랑이, 모란, 기러기, 책가도, 기명절지도, 문자도 등이 그런 목적으로 그린 그림이다. 채색화는 교훈을 전하고 기록하는 기능도 했다.

채색화가 갖는 기능으로서 의미는 일제강점기 서구 모더니즘 미술이 수입되며 폄하됐다. 모더니즘 미술은 미술품의 수요가 생기는 맥락을 걷어내고 예술 그 자체로만 바라본다. 성화가 교회에서 나와 미술관에 걸리는 것처럼 말이다.

전시를 기획한 왕신연 학예사는 한국에서 모더니즘 미술이 공식화된 기점을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선전)라고 본다. 그는 도록에서 “조선총독부가 주최한 이 공모전을 통해 근대적 프레임으로 재단된 순수미술만이 출품됐다. 순수미술로서 일본화라는 채색화 양식이 국내에 소개됐다”고 설명한다.

벽사와 길상의 바람을 담은 전통 채색화는 선전 근처에 얼씬도 하지 못했다. 올해는 선전이 시작한 지 100년이 되는 해다. 그런 즈음에 주변부 미술로 밀려난 전통 채색화의 역할에 새삼 주목한 것은 뜻깊다.

사진은 작자 미상의 19세기 ‘매화 책거리도’ 8폭 병풍.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채색화가 갖는 ‘길상’ ‘기록’ 등 역할에 주목한 것은 전시를 종횡으로 확장할 수 있는 묘수가 됐다. 전시는 시간적으로 1879년 제작된 궁중회화 ‘왕세자두후평복진하계병’(왕세자 순종이 천연두를 앓다가 회복하자 이를 기념해 제작한 병풍)에서부터 당대의 원로는 물론 신진작가까지 망라한다.

장르상으로는 전통 회화에서 유화, 공예, 서예, 조각, 미디어아트, 패션 사진까지 아우른다. 점점 난해한 동시대미술로만 전시 영역을 국한해오던 국립현대미술관이 이처럼 경계를 허물고 한판 잔치를 벌인 적은 없었다. 동양화 출신 작가들에게 이렇게 대규모로 판을 깔아준 적도 없었다.

그런데 이 다기한 장르를 어떻게 서로 얽히지 않게 전시장에 풀어냈을까. 전시는 전통 회화의 역할을 ‘벽사’ ‘길상’ ‘교훈’ ‘감상’ 등 네 주제로 나누지만 주제별로 단순히 구획하지 않는다. 한옥을 방문하는 여정을 상상하고 그 동선에 따라 공간을 구획했다. 대중에게 편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첫 번째 ‘마중’에서 존스톤의 영상이 제시됐고, 두 번째 ‘문앞에서: 벽사’에선 신상호 작가의 토템상 조각을 세우고 까치 호랑이 개 닭 등 벽사의 기능을 하는 다양한 동물 그림들이 전시됐다. 리움 소장 전통 회화 ‘호작도’, 조계종 성파 종정의 대형 옻칠 호랑이 그림 ‘수기맹호도’, 민중미술 간판 작가 오윤이 호랑이가 덩실덩실 춤을 추는 장면을 새긴 판화 ‘무호도’가 이 코너에 나왔다.

채색화의 인기 주제였던 모란 등 화조화, 장수의 소망을 담은 여러 동물 그림은 세 번째 ‘정원에서: 십장생과 화조화’ 코너에서 다룬다. 노무현 대통령이 사랑했던 통영의 화가 전혁림의 유화 ‘백낙병’과 홍익대 동양화과 출신의 50대 화가 홍지윤의 아크릴화 ‘접시꽃 들판에 서서’ 등이 여기에 모였다. 20세기 초 작자 미상의 ‘목단괴석도’ 10폭 병풍 등 전통 화조화와 모란도를 재해석한 손유영의 모란숲 병풍 등이 함께 나와 시간을 초월해 어우러졌다.

채색화에서 빠질 수 없는 키워드인 ‘오방색’은 네 번째 코너에서 두 전시실을 잇는 중앙 홀을 사용해 거대한 설치작업처럼 전시됐다. 다섯 번째는 ‘서가에서: 문자도와 책가도, 기록화’로 꾸몄다. ‘서궐도’를 모사한 작품도 있지만 원로 화가 임동식과 그의 벗이자 아마추어 작가인 우평남의 합작품을 ‘개인 기록화’라는 관점에서 불러냈다.

마지막으로 ‘담 너머, 저 산: 산수화’에선 감상용으로 제작된 채색화 장르인 산수화를 다룬다. 산수화는 채색화라도 선전에 당당히 출품되고 사랑받았다. 1970년대 인기 절정을 구가했던 청전 이상범의 ‘무릉도원도’(전시 중 교체)와 40대 손동현이 송나라 곽희의 ‘조춘도’를 패러디한 ‘이른 봄’ 연작 등이 나왔다.

채색화는 일제강점기에는 일본화의 기세에 밀렸고 해방 후에는 왜색이라 지탄받았다. 해방 후 생긴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도 소외됐다. 67년 국전에서 채색화가 수묵화 위주 심사위원에 의해 고의로 낙선됐다며 채색화가들이 덕수궁에서 낙선전을 한 적도 있다. 이번 전시는 점점 주변부로 밀려난 동양화 화가들의 고군분투 생존기로도 읽힌다.

요약하면, 채색화의 역할이라는 키워드를 내세워 140여년을 관통하는 전통의 계승과 변주를 보여주는 전시다. 9월 25일까지.

과천=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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