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한 공황 조짐… 일자리 많고 수요 폭발에도 생산·투자 ‘뚝’

미·중 갈등·우크라 전쟁 ‘파장’
글로벌 인플레로 불황 공포 확산
“기업들, 구인난에 원료·부품 없어”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지난달 27일(현지시간) 워싱턴DC 연준 청사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날 연준은 40년 만에 최고로 치솟은 물가를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0.75% 포인트 인상하는 ‘자이언트 스텝’을 단행했다. 앞서 미국의 6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작년 동월보다 9.1% 올라 1981년 12월 이후 40년 만에 최대 상승률을 기록했다. EPA연합뉴스

글로벌 인플레이션으로 불황 공포가 커지고 있지만 미국과 서방, 한·일 등 선진국들의 일자리는 여전히 남아돌 지경이다. 구하는 기업이 사정을 해도 취직하겠다는 사람이 없는 ‘총체적’ 구인난 상태다. 새 자동차를 사려면 최소 6개월을 기다려야 하는데도 구매하겠다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생필품을 비롯해 사치품, 명품까지 출시되는 족족 동이 난다.

이처럼 수요가 폭발하는데도 기업들은 공장을 가동할 수 없다. 코로나19 팬데믹에 따른 원자재·부품·공급망 부족 사태에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급등한 석유 가격, 곡물 부족 현상까지 동시다발로 터졌기 때문이다. 공장을 더 돌려 상품을 만들어야 하는데 원료도 부품도 원자재도 없다. 거기다 노동력마저 부족한 상황인 것이다.

전통적인 경제학의 잣대로 보면 수요 과잉과 공급 부족은 전형적인 호황의 사인(sign)이다. 공급이 수요를 감당할 수 없게 되면 일시적으로 인플레이션은 발생하겠지만 기업들의 더 많은 투자가 일어나고, 더 많은 투자는 더 많은 일자리와 더 높은 실질임금을 창출한다. 생산기업의 주머니가 불어나면 주식가격도 오른다. 금융이 활성화될 뿐 아니라 국가는 더 많은 세금을 걷어 사회간접자본(SOC) 투자에 나선다. 모든 게 선순환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세계 경제는 똑같은 현상이 나타나는데도 호황과 전혀 반대의 상황에 직면해 있다. 경제주체들은 전대미문의 공황이 닥쳐올 것이란 공포에 휩싸여 있다.

경제 전문가들은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형태의 불황이 야수처럼 어두운 그림자를 드러내기 시작했다”고 진단하고 있다. 기존의 경제질서, 전형적인 진행 형태를 답습하지 않는 새로운 형태의 불황이 코앞까지 다가왔다는 뜻이다.

미국 노스다코타주립대 데이비드 플린 교수(경제학)는 12일 뉴욕타임스(NYT)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경제는 지금 완전히 카오스에 빠진 상태”라고 단언했다. 플린 교수는 “수요와 공급으로 보면 지금 경제는 불황처럼 보이지 않고 심지어 특정 국가, 특정 지역은 엄청난 이익을 챙기고 있다”면서 “그러나 기업 입장에서는 노동자를 구할 수도 없고, 제품을 생산할 원료와 부품도 없으며, 앞으로 이런 상황이 개선될 것이란 희망도 없다”고 지적했다.

플린 교수뿐 아니라 다른 경제학자들이 공통적으로 우려하는 대목은 바로 투자다. 호황의 최종 지표는 기업이 얼마나 많은 잉여이익을 생산설비와 공장을 짓는 데 투자하느냐다. 기업이 투자해야 더 많은 일자리, 더 높은 실질임금, 더 많은 세금, 더 건전한 국가 재정이 완성될 수 있어서다. 그런데 전 세계 투자를 선도하는 선진국 글로벌 기업들은 투자를 늘리기는커녕 되레 투자규모를 현재 수준으로 동결하거나 더 줄이고 있다.

지난 2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세계 최대 대형할인매장 월마트의 대규모 직원해고와 매장 축소 결정을 보도하면서 “엄청난 물가 상승에도 월마트의 순이익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훨씬 줄어들었고, 앞으로도 개선될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는 게 회사 경영진의 판단”이라며 “경기에 가장 민감한 월마트의 투자 축소는 이미 미국의 일반 소비자들까지 지갑을 닫아야 한다고 느끼고 있음을 방증한다”고 분석했다.

NYT는 이런 상황을 ‘지정학적 공황’으로 규정했다. 경제단위가 점점 더 ‘세계화’되면서 이제는 모든 원료와 광물, 농산물, 반도체 등 첨단 전자부품 등이 국제적인 공급망 없인 수급 자체가 불가능한 연쇄구조가 생겨났고, 이 연결망 어느 하나에 문제가 생기면 세계 경제 전체가 신음하게 됐다는 것이다.

신문은 “코로나19 팬데믹과 지난 2월 터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모든 형태의 국제 공급망이 크게 흔들리게 됐다”면서 “기업들은 이 공급망이 정상화되기 전까지 결코 투자를 늘리지 않을 태세”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지정학과 국제관계는 경제를 설명하는 데 그저 참고적인 변수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가장 결정적인 변수로 바뀌었다”고 평했다.

지정학이 지금의 세계 경제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미·중 갈등이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중국이 아무리 무리한 대외·대내 정책수단을 쓴다 해도 경제교역 관계를 건드리진 않았다. 위구르족을 탄압해도 미국 기업은 중국 내 하청업체에서 상품을 생산했으며 중국산 광물과 부품을 가져다 썼다.

그런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 때부터 대중 경제제재 모습을 보이더니 조 바이든 행정부가 들어서면서는 중국의 대미 교역뿐 아니라 대서방 교역까지 세세하게 규제하기 시작했다.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을 배제한 새로운 국제 공급망 질서를 구축하겠다는 의지까지 내비친다. 한·미·대만·일본이 연합하는 반도체 동맹(칩4)이 대표적이다. 서방 입장에서 중국은 이미 ‘세계의 공장’이란 명성을 접고 최고의 투자처에서 최악의 투자처로 바뀌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역시 엄청난 자원부국 러시아와 농업대국 우크라이나의 역할을 세계 경제에서 지우게 만든 사건이다. 러시아 때문에 석유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랐고, 우크라이나 때문에 생필품인 식량가격마저 급등했기 때문이다.

NYT는 미국 조지워싱턴대 타라 싱클레어 교수(경제학)의 말을 인용해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후 미국과 서방은 ‘진짜배기’ 호황을 이뤄본 적이 없다”면서 “2010년 이후 기업이 순익을 필요충분하게 투자하는 선순환이 일어나지 않았고 그 악순환이 올해 한꺼번에 터지는 듯하다”고 설명했다.

또 미국 경제전문 싱크탱크 ‘경제혁신그룹’의 애덤 오지멕 수석이코노미스트의 말도 인용해 “아직 미국·서방·극동 선진국 중심의 새 공급망 체계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업들이 쉽게 투자에 나설 리 만무하다”면서 “아마도 기업 입장에서 이 판단은 앞으로 몇 년간 더 현명한 것일지 모른다”고 전하기도 했다.

신창호 선임기자 proco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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