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박희천 (10) 주일학교 선생 시절 내 재간만 믿고 우쭐대다 학생수 줄어

찬송가 외우게 하고 모든 문제 바로 해결
주위에 입소문 나며 학생수 늘다가 급감
그제야 무릎 꿇고 교만함 회개… 다시 부흥

1952년 7월 고신 전국 중·고등·대학생 연합수련회 참석자들. 일부 학생들은 박희천 목사가 맡고 있는 부산남교회 주일학교를 견학하러 왔다.

비록 1년 반을 제대로 먹지 못했으나 다니엘서 1장 15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내게 건강을 주셔서 별 탈 없이 지냈다. 1년 반이 지나자 부산남교회에서 제과점 집사님 댁에 쌀을 지급했다. 그 집사님이 점심 도시락을 싸주면서 비로소 허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때 왜 그렇게 굶고 살아야 했을까 의문이 들곤 했는데 나중에 신학교 강단에 섰을 때 그 이유를 깨달았다. 내가 부산남교회같이 큰 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면서 좋은 대접을 받았다면 신학생들에게 “충성하라”는 말을 자신있게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사례비 없이 굶으면서 긴 시간 사역했다고 하면 신학생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부산남교회 주일학교를 맡았을 때 유치부에서 국민학교 6학년까지 200명 정도가 모였다. 나는 찬송가를 1절부터 4절까지 전부 외도록 했다. 아이들이 나중에 커서 혹시 방탕한 길에 들어서더라도 어릴 때 부르던 찬송가 가사에 이끌려 바로 돌아서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1952년 7월 전국 중·고등·대학생 연합수련회가 고려신학교에서 일주일간 열렸다. 시골에서 온 학생들에게 대도시에 있는 부산남교회 주일예배를 견학할 기회가 있었다. 학생들은 자기 교회로 돌아가 “남교회 유년 주일학교 대단하더라. 잘한다”는 소문을 냈다.

53년 6월 주일학교 학생은 360명으로 늘어났다. 곧 종전이 됐고 주일학교는 부흥하는 것처럼 보였다. 주일학교에서 무슨 문제가 생기면 내가 바로 해결했다. 나는 속으로 ‘내 손은 약손이야’라고 말하곤 했다. 우쭐댔다. 그런데 그해 9월부터 학생이 차츰 줄어들기 시작했다. 내가 나서면 곧 회복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학생 수가 점점 줄었다. 54년 1월 첫 주 예배에 참석한 학생은 130명이었다.

처음 맡았을 때보다 70명, 가장 많았을 때보다 230명 줄었다. 그제야 머리가 아팠다. 그 주일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 바로 교회에 갔다. 무릎을 꿇고 앉으니 눈물밖에 나오지 않았다. 원인을 깨달았다. ‘하나님을 제쳐두고 내 기술과 재간을 믿고 덤비다가 이 꼴이 됐구나.’ 금식하며 종일 기도했다. “하나님은 없고 내가 전부였습니다. 회개합니다.” 그날 내가 무력한 존재란 걸 깨달았다. 교만하면 망한다는 것을 마음 판에 새겼다. 54년 6월 하나님의 은혜로 학생 수는 다시 360명 선으로 회복됐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말은 ‘내가’가 아닐까 생각한다. 매사에 내가 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모든 것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 나는 그날 이후 지금까지 내 자신을 부인하며 사는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 나는 고신신학교를 다니며 박윤선 목사님에게 설교를 배웠다.

과거 내가 다닌 평양신학교에서 배운 설교는 풍유적 해석이었다. 여러 비유와 예화를 들어 풀이하는 방식이다. 박 목사님은 본문을 중심으로 설교했다. 훗날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가르칠 때 문자적 해석법을 충실히 전수했다. 한국교회 목사들 중에는 본문과 상관없이 풍유적 설교를 하는 이들이 많다. 안타까운 일이다.

정리=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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