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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춘추] 금융 혁신이라는 신기루


‘동북아 금융허브’ ‘한국판 골드만삭스’ ‘금융의 삼성전자’에 이어 ‘금융의 BTS’까지. 한국 금융은 언제나 그 시대 최고를 지향한다. 2000년대 초 노무현정부는 아시아의 금융중심지인 홍콩 싱가포르와 맞장을 떠보겠다며 동북아 금융허브를 내세웠다. 2010년 전후로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 세계 IT 시장을 호령하는 삼성전자가 소환됐다. 급기야 현 정부는 “글로벌 금융시장을 선도하는 플레이어 출현”(김주현 금융위원장)을 다짐하면서 세계적 그룹 BTS를 본보기로 끌어들였다.

그런데 매번 이런 목표가 등장했다는 것은 돌려 말하면 매번 시도가 실패했다는 뜻이다. 동북아 금융허브가 됐으면 굳이 BTS를 찾을 이유는 없다. 한국 금융의 목표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대동소이하다. 내용이 ‘자산운용업 발전’(동북아 금융허브), ‘대형 투자은행 육성’(골드만삭스, 삼성전자), ‘플랫폼 서비스와 인공지능(AI) 활용’(BTS)으로 약간씩 다를 뿐 규제 완화를 통한 금융산업의 고도화·선진화가 궁극적 도달 지점이다. 하지만 고지 근처에 가본 적도 없고, 갈 길도 멀다.

2003년에 제시된 ‘동북아 금융허브’ 청사진은 ‘2007년까지 세계 50대 자산운용사 주요 거점 유치, 2012년까지 특화 금융허브 완성, 2020년까지 투자은행 지역본부 유치’였다. 왜 쓴웃음만 나올까. 굴지의 금융기관 유치는커녕 그사이 HSBC, 골드만삭스, UBS 등 세계 유수 은행들이 한국지점을 닫았다. 씨티은행은 지난해 한국 소비자금융 철수를 결정했다. 세계적 금융사를 한곳에 모으겠다며 서울 여의도에 세워진 국제금융센터(IFC)는 일반인들에게 근사한 쇼핑몰로 더 알려져 있다. 영국 금융 전문지 ‘더 뱅커’가 지난달 공개한 ‘세계 1000대 은행’에서 한국 시중은행 중 KB금융이 62위로 가장 높은 순위를 차지했다. 4대 은행 모두 전년도보다 순위가 후퇴했다. 경제 규모 세계 10위, 무역 규모 세계 8위의 위상에 한참 못 미친다.

정권 초마다 거창한 금융 혁신과 규제 완화를 약속한다. 그러다가 금융권 사건 사고, 대내외 경제 환경이 바뀔 때마다 언제 그랬냐는 듯 없었던 일이 돼버린다. 금융허브 조성을 위해 세제 개편, 노동 정책 수정을 꾀하려 하면 시민단체와 야당의 반대에 꼬리를 내리기 일쑤다. ‘한국판 골드만삭스’ 구호는 금융위기 이후 용두사미가 됐다. 희망고문이 반복된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출혈 경쟁으로 영업이익이 급감하자마자 2012년 중국 시안과 경기도 평택에 반도체 공장 추가 설립을 발표했다. 난관이 닥칠 때 오히려 대대적 투자로 미래를 대비하는 삼성전자를 한국 금융이 본받자는 구호 자체가 초현실적이다.

결국은 익숙한 이자놀이, 수수료 따먹기로 돌아간다. 올 상반기 4대 은행 순익은 약 15조원으로 최대 기록을 1년 만에 갈아치웠다. 지난해에는 코로나 유동성에 따른 대출이 늘어서, 올해는 대출 억제로 인한 금리 상승으로 떼돈을 벌었다. 경제 위기로 서민은 곡소리를 내는데 은행은 풍악을 울리고 있다. 신사업 진출, 금융 혁신이 귀에 들어오겠나. 나태함에 구태와 모럴해저드가 빠지면 섭섭하다. 8년간 직원 한 명이 700억원 가까운 돈을 횡령해도 은행은 몰랐다. 시중은행들은 업체 규모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7조원가량의 비정상적 해외 송금을 기꺼이 해줬다. 금융업 먹거리 차원으로 당국이 규제를 풀어준 사모펀드는 금융권에겐 사기용 도구일 뿐이었다. 관료와 정치권은 한술 더 뜬다. 규제 개혁을 외치는 입으로 이자율, 가격까지 간섭하고 인사권을 휘두른다. 낙하산은 왜 그리 많은지. 정권 초만 반짝일 뿐 그렇게 금융 혁신은 신기루가 돼간다.

금융 산업에 대한 원칙과 철학이 없으면 어떤 아이콘을 빗대도 발전은 요원하다. 핀테크 빅테크의 등장, 4차 산업혁명의 도래에 업권 경계선이 무너지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 불안, 신냉전 여파 등으로 제조업 환경이 불투명한 지금이 금융업 도약의 적기다. 2017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8개국 대상으로 금융혁신 활동 수준(연구개발 집약도)을 비교한 결과 한국은 꼴찌였다. 여건과 상황이 다르다 해도 제조업과의 격차가 너무 크다. 금융 안정과 금융 혁신이 별개라는 사고부터 탈피해야 한다. 결국 사전 규제를 풀고 사후 규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개선하는 게 시급하다. 미국 대통령조차 손을 내미는 제조업 강국이 K금융의 시작 정도는 알릴 때가 됐다.

고세욱 논설위원 swko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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