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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시각] 누칼협과 빚투

김상기 콘텐츠퍼블리싱부장


‘누칼협’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요즘 인터넷 커뮤니티나 온라인 기사 댓글 등에서 종종 등장하는 말이다. 아직 널리 알려지진 않았는지 내 주변 사람들에게 ‘누가 칼 들고 협박함?’의 줄임말이라고 하면 다들 ‘아하~’ 하며 무릎을 탁 하고 친다. 원래 온라인게임을 즐기던 유저들이 주로 썼다. 게임 아이템을 비싸게 샀다가 손해 보고 되판 뒤 투덜대는 유저에게 ‘그러게 누가 사라고 칼 들고 협박이라도 했나요? 본인이 질러 놓고 왜 앓는 소리 함?’ 등으로 놀리던 일종의 ‘밈’이었다.

누칼협은 이후 사이버 세상의 치열한 논쟁적 사안에서 상대방의 기를 죽이는 무적의 논리를 지닌 ‘끝판왕’으로 발전했다. ‘어렵게 공무원 됐는데 쥐꼬리 월급 보고 혼이 쏙 빠지네요. 어떻게 먹고살아야 할지 막막합니다’라는 호소 글에 ‘누칼협함? 싫으면 그만두면 되지’라거나 ‘이번 연휴에 강원도로 놀러 갔는데, 차가 어찌나 막히던지 죽다 살아났어요. 괜히 놀러 갔나 봐요’라고 누군가 쓴 글에 ‘연휴니까 차 막히죠, 누가 내려가라고 칼 들고 협박함?’이라고 쏘아붙이는 식이다. 그러다 최근에는 윤석열정부와 사법 당국이 부동산과 코인 열풍에 편승해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투자)이나 ‘빚투’(빚내서 투자)를 한 뒤 실패한 청년들을 보듬는 정책을 잇달아 쏟아내자 부쩍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서울개인회생법원이 지난 7월부터 주식이나 가상화폐(코인)에 빚을 내서 투자했다가 어려움을 겪는 청년들을 구제하겠다고 나선 게 시작이었다. 기존에는 개인회생을 신청하면 손실액까지 보유 재산으로 산정해 다 갚아야 했는데 이제 날린 대출금은 갚지 않도록 실무 준칙 조항을 바꾸겠다는 것이다. 1억원 빚으로 투자해 1000만원만 남은 자가 회생을 신청할 경우 기존에는 1억원을 갚아야 했는데 이젠 1000만원만 갚으면 된다는 소리다. 서울회생법원 외에 부산·인천 등 다른 지방법원들은 모두 개인회생 시 주식·코인 투자 손실 변제에 관한 실무 준칙을 바꾸지 않았는데 왜 유독 서울에 사는 빚투 청년만 구제하느냐는 비판까지 제기된 상황이다.

금융위원회가 지난 7월 발표한 ‘청년 특례 프로그램’을 놓고도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만 34세 이하 신용평점 하위 20% 이하 청년층의 재기를 위해 이자를 30~50% 탕감해주고 최대 3년간 원금 상환유예를 하면서 이자율을 3.25%로 적용해 준다는 게 골자다. 신용대출 금리가 5%를 넘나드니 특별 대우다. 그러니 도덕적 해이 우려에다 성실히 빚을 갚아온 이들에 대한 역차별이라는 아우성이 이어질 수밖에. 금융위는 채무조정 감면분의 경우 대출을 내준 금융회사가 나눠 지니 세금을 허투루 쓰는 것이 아니며 원금 탕감이 아니라 이자 탕감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보통 청년들의 분노를 잠재우기는 어려워 보인다. 아예 빚투를 하지 않았거나 빚투를 했더라도 성실하게 이자를 갚아온 2030들의 아우성은 한마디로 누칼협이다. 의지와 상관없는 중대 변수가 아닌 오로지 자신의 선택으로 벌어진 일까지 감싸는 것은 거꾸로 된 공정이라며 ‘굥정(윤석열식 공정)’이라는 비아냥도 나온다.

‘정부야, 내 빚 1억도 갚아주라. 난 투기도 주식도 안 했다. 생활비로 썼으니 정직하게 빚졌다. 내 빚부터 갚아주라’. 인터넷에서 수천 개의 ‘좋아요’를 받은 댓글인데 한참을 생각해도 반박할 논리가 떠오르지 않는다. 국민들로부터 더 많은 지지를 얻으려면 영끌과 빚투에 실패한 서울 사는 청년만 감싸지 말고 성실하게 살았지만 삶이 버거운 보통 사람을 따뜻하게 안아주면 된다. 무엇보다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많을 테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포퓰리즘 아닌가.

김상기 콘텐츠퍼블리싱부장 kitti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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