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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당] 동원령의 풍경

태원준 논설위원


이집트로 신혼여행을 떠났던 러시아 부부는 21일 모스크바로 돌아가는 길에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예비군 동원령 선포 뉴스를 접했다. 경유지인 이스탄불 공항에서 남편은 비행기에 오르지 않았다. 예비군이어서 집에 징집 통지서가 날아와 있을지 몰라 아내만 보냈다. 그는 야간 버스를 타고 조지아 트빌리시로 갔다. 아내가 짐과 돈을 챙겨오면 트빌리시에 정착하기로 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끌려가느니 아예 러시아를 떠나기로 한 것이다. 신혼여행에서 알콩달콩 세운 인생 설계가 순식간에 송두리째 바뀌고 말았다.

푸틴의 동원령은 러시아인의 삶을 뒤흔들어놓았다. 외신이 전하는 그 풍경은 저 신혼부부 사연처럼 드라마틱하다. 알렉산드르라는 남성은 TV로 중계된 푸틴의 동원령 연설이 끝나기도 전에 짐을 싸기 시작했다. 자녀가 넷 이상이면 징집 대상에서 빠지는데, 그는 셋이었다. 모스크바 공항에 달려가 이스탄불이나 알마티(카자흐스탄)행 비행기를 타려했지만 매진돼 있었다. 하는 수 없이 표가 남은 나망간(우즈베키스탄)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는 “처음 듣는 도시였는데, 내 옆자리 남자도 처음 들었다더라”고 했다.

곳곳에서 반전시위가 벌어진 21일 경찰서에 끌려갔던 20대 청년 미하일은 “경찰이 8시간 만에 풀어주며 징집 통지서를 내밀더라”고 말했다. 시위 차단용 징집에 불응한 그는 도피생활을 택했다. 시베리아 외진 곳에 사는 남성은 “밤 11시에 찾아와 징집 통지서를 주고 갔다”고 했고, 북극권 마을에도 징집자를 태워 갈 비행기가 날아들었다. TV에서 보던 전쟁이 이렇게 각 가정에 쳐들어오자 러시아인들은 당황하고, 또 분노하고 있다.

전쟁이 시작된 2월 24일 우크라이나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대통령도 동원령에 서명했다. 그 대상인 이들이 가족을 기차에 태워 피난 보내고 전쟁터로 향하는 모습은 많은 사진과 영상에 담겼다. 맞서 싸우는 두 나라에서 벌어진 동원령의 풍경은 사뭇 다르다. 국민의 공감을 얻지 못한 푸틴의 전쟁. 그는 이미 졌다.

태원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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