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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을새김] 감수성의 시대

권혜숙 인터뷰 전문기자


#며칠 전 TV 채널을 돌리다가 영화 ‘인디아나 존스와 미궁의 사원’을 다시 보게 됐다. 해리슨 포드가 연기한 인디아나 존스는 여전히 유쾌하고, 액션과 추격전이 짜릿해 오락영화로 나무랄 데 없었다. 그런데 거칠게 말하자면 영화의 내용은 백인인 인디아나 존스가 아이들을 납치·착취하는 동양의 야만적 이교도를 무찌르고 아이들과 마을의 구원자가 된다는 것이다. 1984년 영화였기에 망정이지, 요즘 개봉했더라면 그때 같은 흥행 성공은 언감생심이었을 것이다.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과 서구 제국주의적 시각이라는 비판으로 평점 테러를 피하지 못했을 테니.

#디즈니플러스에서 방영 중인 마블의 새 시리즈 ‘변호사 쉬헐크’는 뜻밖의 사고로 헐크가 된 헐크의 사촌 여동생 제니퍼의 이야기다. ‘쉬헐크’는 화제성은 높지만 평가가 좋지 않다. 컴퓨터그래픽(CG)이 허술한 탓도 있지만 ‘PC(Political Correctness·정치적 올바름)가 묻어서’라는 반응이 다수다. ‘묻었다’는 부정적 뉘앙스의 단어를 사용하는 건 이런 평가를 하는 이들이 여성을 앞세우거나 소수자 차별에 반대하는 콘텐츠를 탐탁지 않아 하기 때문이다. ‘PC 묻은’ 작품에는 악플이 쏟아지기 일쑤다.

‘쉬헐크’는 주인공이 여성 슈퍼히어로인 자신의 등장을 환영하지 않는 뉴스를 보는 장면에 실제로 쉬헐크에 쏟아진 악플을 그대로 가져다 썼다. “미투 운동하더니 남자 히어로 씨가 말랐나?” “헐크의 남자다움을 뺏어서 그걸 웬 여자한테 준다고?” “왜 슈퍼히어로를 다 여자로 바꿔요, 아무도 원하지 않는데!” “여자 히어로도 괜찮은데 자기 캐릭터를 만들라고요.”

#지난주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EBS)를 진행하는 설채현 수의사를 만났다. 그가 원장으로 있는 서울 강남구 놀로 행동클리닉 1층에는 ‘반려(伴侶): 짝이 되는 친구, 함께 살아가는 구성원’이란 문구가 크게 붙어 있었다.

“애완견은 예전 단어죠. 사랑할 애(愛)와 희롱할 완(玩)을 써서 사랑하는 장난감이라는 뜻이에요. 그래서 저는 견주 대신 보호자라고 해요. 애완견이 장난감이라면 어울리는 단어는 주인이고, 가족이라 여겨서 반려견으로 부른다면 보호자가 어울리죠. 또 훈련보다 교육이라는 말을 써요. 시각장애인 안내견이나 경찰견, 군견 같은 특수 목적견들은 사람의 목숨과 관련된 일을 하기 때문에 실수하지 않게 훈련을 받아야 하지만 반려견은 실수해도 괜찮잖아요? 꼭 이런 말을 써야 한다고 강요할 수 없지만 이렇게 계속 얘기하다 보면 조금씩 바뀌어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어린 시절 거실이 아닌 마당에 개집을 두고 개에게 사료가 아닌 잔반을 먹이는 게 당연했던 4050세대나 영양탕과 사철탕이 익숙했던 더 윗세대는 동물권까지 신경 써서 말을 골라야 하냐고 고개를 저을지도 모르겠다. 젠더 감수성, 다문화 감수성, 노동 감수성, 환경 감수성, 동물 감수성…. 감수성은 넘쳐나는데 세상은 더 메마르고 각박해졌다는 푸념도 들린다. 지금 당장 언어와 사고 체계를 뜯어고쳐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이 아니다. 적어도 “동물을 대하는 태도가 곧 우리 사회가 약자를 대하는 태도”라는 설 원장의 말은 설득력 있었다.

바야흐로 감수성의 시대인가 싶지만 PC를 얘기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벌써 약자를 보호하는 게 역차별이고, 혐오를 권리라고 말해도 박수가 나오는 세상이 되고 있다. 감수성을 높이는 것은 때로 복잡하고 피로하다. 판단 기준은 계속 빠르게 변한다. 그래도 가끔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의심하고 질문하며 돌아봐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때도 맞고 지금도 맞다’고 확신할 수 있는 것들이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권혜숙 인터뷰 전문기자 hskw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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