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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욱 칼럼] 쿨하게 털어놓고 끝낼 일이다


동선 얽힌 다자 외교무대에서
종종 발생하는 가십성 해프닝

대통령실, 그런 일 없다면서
우기지 말고 솔직히 해명해야

민주당도 지지자만 환호하는
무리한 공세는 이제 그만둘 때

토요일 저녁이면 가족들과 TV를 틀어놓고 ‘놀라운 토요일’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본다. 연예인들이 모여 들리지 않는 노랫가사를 맞혀가는 내용이다. 요즘 노래는 박자가 빠르고 랩이 섞여 좀처럼 알아 들을 수 없다. 가사에 담긴 메시지를 느긋하게 음미하던 7080세대는 곤혹스럽다. 영어와 유행어가 현란하게 섞인 가사는아예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처음에는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젊은 연예인들도 가사를 못 알아듣는다는 데 놀랐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한 단어도 알 수 없었던 가사인데 미리 알고 들으면 어김없이 귀에 꽂힌다는 점이다. 불확실한 정보를 결합하고 추론하는 전두엽이 집중적으로 발달하면서 인류가 문명을 이루게 됐다는 사실을 또다시 절감하는 순간이다.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해주면 바이든은 쪽팔려서 어떡하나.” 누가 뭐래도 그렇게 들린다. 유튜브 동영상을 여러 번 돌려봤지만 결론은 마찬가지다. 자막부터 봐서 선입견이 생겼기에 그런지 모르겠다. 하지만 대통령실 해명대로 ‘날리면’으로는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승인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 수 없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무슨 말을 하고 나오는 길이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건 당사자인 윤석열 대통령과 그 자리에 있던 박진 외교부 장관만이 설명할 수 있다. 윤 대통령이 바이든 대통령과 대화한 48초 동안 인플레이션감축법(IRA)과 관련해 미 행정부가 의회에 뭔가를 요청했다는 내용의 대화가 있었다면 ‘승인 안해주면’이라는 말에 논리적 모순이 생기지 않는다. 또는 런던에서 바이든 대통령과 한·미 통화스와프 재개 등 외화 유동성 공급을 위해 의회의 협조가 필요한 어떤 조치를 논의했고, 뉴욕에서 이를 다시 확인했다면 대통령실이 발표한 순방외교 성과와도 큰 차이가 없다.

전두엽을 최대한 가동해 추론해보면 윤 대통령이 한 문제의 발언은 슬쩍 의회로 책임을 떠넘긴 바이든 대통령이 미심쩍다는 속내를 옆에 있던 외교부 장관에게 토로한 것으로 보인다. AFP 보도대로 ‘핫 마이크 사고(마이크가 켜진 걸 모른채 나온 실언)’였던 것이다. 각국 대표들의 일정이 복잡하게 얽힌 다자 외교무대에서 종종 발생하는 가십성 해프닝으로 국격과 국익, 국민의 자존심에 심각한 타격을 입힌 중대한 사건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이 알려진 22일 새벽 이후 윤 대통령과 국회의 대응은 실망스럽다. 이제는 해프닝이 아니다. 윤석열정부가 국정을 운영하는 수준이고, 정쟁에 매몰된 국회의 민낯이다. 가장 먼저 비난을 받아야 할 곳은 대통령실이다. 그냥 쿨하게 “그런 일이 있었다. 공식 일정을 마친 뒤였지만 거친 말을 사용한 것은 미안하다”고 했으면 민주당이 외교부 장관 해임건의안을 당론으로 채택할 정도로 판이 커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몇몇 외신이 ‘f***er’라며 과장되게 번역했지만 차분히 설명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대통령실은 지레 놀라 일을 키웠다. ‘미국 의회가 아니라 한국 국회’ ‘바이든이 아니라 날리면’은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 듣는 사람을 바보로 아는 최악의 해명이었다.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주말 내내 고민하더니 월요일 아침부터는 문제의 발언을 아예 없던 일로 만드는 강경 전략으로 선회했다. 윤 대통령이 직접 “사실과 다른 보도로 동맹을 훼손했다”고 말한 뒤 국민의힘 의원들이 일제히 나서 야당과 언론을 향한 총공세를 이어가고 있다. 무엇을 얻겠다는 것인지 전략을 알 수 없고, 이길 방법이 무엇인지 전술도 모호하다. 웃통 벗고 한번 싸우자는 대통령실과 집권여당. 분명히 정상이 아니다.

야당의 과도한 공세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문제다. 지금 민주당의 모습은 그냥 웃프다. 런던 일정에는 ‘조문 없는 조문외교’라고 비난을 쏟아내더니 뉴욕 일정에는 ‘막말 외교참사’라고 몰아세운다. 누구라도 조금만 관심을 갖는다면 민주당이 이렇게까지 흥분할 일이 아니라는 걸 금방 알 수 있다. 외교무대에서 마음먹은 대로 성과를 내기는 쉽지 않다. 민주당도 지난 5년 동안 집권여당으로서 초강대국들을 상대로 악전고투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많은 사람이 윤석열정부의 외교 미숙을 아쉬워하면서도 민주당을 향해서는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는 이유를 생각해야 한다. 얻을 것은 강성 지지자의 환호뿐인 무리한 싸움은 이제 접어둘 때가 됐다.

고승욱 논설위원 swk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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