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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돋을새김] 서초동 의존증에 걸린 여의도

지호일 사회부장


“앞으로는 의원들이 스스로에게 총을 쏴서 죽이는 일은 절대 있어선 안 됩니다.” 2020년 5월 문희상 당시 국회의장이 퇴임식에서 남긴 말이다. 그 전년에 있었던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 충돌 사건으로 여야 의원 37명이 한꺼번에 기소된 상황을 탄식한 것이다. 그는 “21대 국회는 통합의 모습으로 새 출발할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한다”고 했다.

그러나 6선 원로의 마지막 당부는 국회 안에서도 메아리가 없었다. 고소·고발의 ‘상호 총질’은 이후로도 계속되고 있고, 여의도 정치의 사법 의존증은 갈수록 정도가 심해지는 모습이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내부 갈등을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해 당 지도부 구성 문제까지 법원 허락을 얻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안 될 줄 알면서 재판부 교체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하는 촌극도 빚었다. “법원은 선을 넘지 마라”고 버럭해보지만 이번 일의 시작점도, 사건을 법대에 올린 것도 국민의힘 내부 아니던가.

거대 야당 더불어민주당은 이미 선거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이재명 대표의 ‘사법 리스크’를 당과 사슬로 한데 묶어버렸다. 이 대표는 성남FC 후원금 의혹, 쌍방울 변호사비 대납 의혹 등 바싹 다가온 몇 갈래의 검찰 수사도 앞두고 있다. ‘김건희 특검법’을 발의하고, 형사소추권이 없는 대통령까지 선거법 위반으로 고발하며 맞불을 놓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는 아닐진대, 민주당은 스스로 ‘정치의 사법화’ 길을 택했다.

갈등 조정 능력을 상실한 정치권이 검찰이나 법원으로 소장을 들고 찾아가는 장면은 이제 일상이 됐다. 이런 현상은 그 자체로 정치력 부재, 정치 퇴행을 드러낸다. 대화와 타협의 여지를 좁히고 정치를 더욱 무능하게 만드는 악순환을 부른다. 정치의 사법화가 법치주의 확산 등에 따라 세계 여러 나라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라 해도, 한국 정치판처럼 정치적 현안을 사법의 영역으로 끌고 가길 상례화한 집단도 없을 듯하다.

그렇다고 정치권이 사법 판단을 딱히 신뢰하거나 존중하는 것 같지도 않다. 애초 목적이 법에 따른 정당한 판단을 구하는 것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압박하고 싸움 영역을 확장하기 위한 정쟁의 수단으로 법을 끌어들인다는 얘기다. 그러니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정치 법원’ ‘정치 검찰’이라고 공격부터 한다. 분쟁 해결을 위한 법적 절차가 오히려 갈등 증폭 기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법원과 검찰에 대한 불신을 키우는 동시에 사법의 정치화, 검찰의 정치화를 초래하는 역효과도 낳는다. 서초동에서 제발 정쟁을 이쪽으로 가져오지 말라는 하소연이 나오는 이유다.

더군다나 검찰 권한 축소를 외쳐 온 정치권이 한편으로 검찰에 계속 칼자루를 쥐여주는 건 지극한 자가당착이다. 검찰에 정치적 수사를 맡기는 건 곧 검찰 힘을 키우는 일이라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말이다. 이런 정치의 사법화는 진영 논리와 ‘팬덤’에 포위된 여의도 정치의 현실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지지자들만 바라보는 정치에서는 굳이 정치력을 발휘해 타협하거나 갈등을 조절할 필요가 없다. 적나라한 싸움 장면이 더 효과적일 테니.

앞으로가 더 문제다. 여든 야든 지금의 정치 실종 상태를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보이지 않는데, ‘전쟁’이란 말이 툭툭 튀어나올 정도로 정치는 사생결단 전장이 되고 있다. 사법과 정치가 뒤엉켜 어디까지가 정치인지, 어디까지가 사법의 영역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될 터다. 이어 서서히 사법 의존을 넘어 사법 종속 단계로 나갈 것이다. 이미 정국을 가를 주요 정치적 행위의 주도권은 상당수 법조가 쥐고 있지 않나.

그다음에 나올 질문. ‘법률가만 있으면 되지 정치인은 왜 필요한가.’ 이미 많은 국민이 알고 있다. 진짜 개혁이 필요한 곳이 어딘지를.

지호일 사회부장 blue51@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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