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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의도포럼] 사관생도 한 명 한 명이 모두 외교관이다

박길성(고려대 명예교수·사회학)


“우리들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지금까지 1세기 이상 다른 나라의 전쟁이나 분쟁에 참여해 자유와 번영을 위해 싸웠지만 한국만큼 진정한 감사를 표시하는 나라는 없다.” “우리들의 용감한 희생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님을 한국은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늘 고맙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호주·뉴질랜드 군인들과 정부 관계자들의 마음이자 이야기다. 필자는 지금 해군사관학교 제77기 사관생도 164명이 110일간 인도·태평양을 횡단하는 장장 3만9800㎞의 순항훈련 일부 구간인 태평양 항로에 참여해 일정을 같이하고 있다. 해양에서 우리의 미래를 찾아보기 위해서다.

호주 시드니 한국전쟁참전비에는 호주 장병들이 가장 치열하게 싸웠던 경기도 가평에서 가져온 큼지막한 직육면체의 화강암 두 개가 헌화대로 놓여 있다. 두 헌화대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여기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지금은 떨어져 있지만 한국이 통일하면 나란히 붙여 놓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상상력과 우리의 통일을 향한 깊은 바람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뉴질랜드 오클랜드 전쟁기념관에서의 한국전쟁 참전 헌화와 참배는 뉴질랜드 해군 군악대의 아리랑 연주 속에서 한참을 가슴 뻑뻑하게, 코끝을 시큰하게 했다. 어떤 노병은 지팡이에, 어떤 노병은 휠체어에 몸을 기대지만 헌화하고 경례하는 모습은 젊은 청년 때의 참전 모습 그대로였다. 헌화한 가장 젊은 참전병이 89세이니 열여덟 살이 되던 해에 한국전을 참전한 셈이다.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나라의 전쟁에 참여한다는 것이 어떤 마음이었을지 쉽게 짐작하기 어렵다. 우리 생도들이 이분들에게 존경을 표하며 절도 있게 호위한다. 생도들의 늠름한 모습에서 마치 자신의 젊었을 때 모습을 회상하는 듯 대견스러워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이분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하기 위해 해군 관계자와 함께 함상 리셉션에 초청한다. 여기에서 우리 생도들은 한국을 대표하는 마음으로 한 분 한 분 정성으로 대한다. 현지 동포들도 함께 초청되는 자리인 터라 분위기는 더 화사하다. 생도들은 깔끔한 정복을 말쑥하게 갖춰 입고 테이블에서 호스트 역할을 톡톡히 한다. 참전용사와 동포들이 궁금해하는 오늘의 한국에 대한 설명이며, 사관학교 생활이며, 순항훈련 경험담이며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함께 참석한 젊은 장병들과는 바로 연락처도 교환하고 SNS 친구 맺기도 한다.

순항하는 각 국가 해군생도와의 교류 활동에서 우리 생도들의 외교 활동은 더 돋보인다. 친선 체육대회를 비롯해 함께 시간을 보내며 해양을 둘러싼 인류 평화와 번영의 공동 관심사에 관해 의견을 나눈다. 언어 소통의 다소 불편함은 MZ세대 특유의 자신감과 친화력 앞에서 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한류가 활짝 꽃을 피우는 요즘이다. 외국에 나와 보면 더 크게 와 닿는다. 이번 9개국 10개 도시를 순항하면서 생도들은 한국의 위상이 자신들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높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한국 노래를 따라 부르려고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 드라마를 보고 싶어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어학당에 다니기도 하고 유튜브에서 한국어를 배운다는 젊은 동년배가 많음을 알게 됐다. 한국의 대중문화가 세계인의 마음에 깊이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가격을 매길 수 없는 매력 자본으로 여겨지는 것이며 쉽게 얻을 수 없는 세계 문화시민권을 획득한 셈이다. 프랑스 문명평론가 기 소르망의 표현대로 한국은 제조 상품과 문화를 동시에 수출해 본 세계에서 몇 안 되는 그 몇 나라에 들어 있다.

문화란 대중문화이든 어떤 장르의 문화이든 흥미나 엔터테인먼트만으로는 그 수명을 오래 가져가기 어려운 속성이 있다. 특히 요즘처럼 기호나 취향의 라이프 사이클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공감하는 가치가 내재돼 있느냐가 중요하다. 우리가 아주 어려웠던 시절 자신들의 생명까지 내놓았던 국민들에게 보은의 마음을 갖는 것은 한국을 상징하는 대문자 K를 탄탄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다. 받은 은혜를 잊지 않고 갚는 것을 보은이라고 한다. 우리 생도들의 활동에서 나타나는 격조 있고 겸허한 보은의 태도와 마음에서 나오는 감동은 오래 지속되기 마련이다. 생도들의 순항훈련 과정에서 보여준 품격 있는 보은의 감사 표시가 한국 사회의 미래를 담보하는 좋은 입자가 될 것이다. 생도 한 명 한 명이 모두 외교관이기에 더 확신이 선다.

박길성(고려대 명예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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