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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열며] 경교장을 나서며

강주화 미션탐사부 차장


얼마 전 경교장을 방문했다. 건강검진을 마치고 나온 병원 코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단아한 2층 양옥이 그날따라 눈에 밟혔다. 사적 제465호. 서울 종로구 평동에 있는 경교장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을 지낸 백범 김구가 1945~49년 집무실 겸 사저로 사용했던 곳이다. 김구가 근처의 경교라는 다리 이름을 따서 경교장으로 붙였다.

김구의 유품, 생애를 조망하는 자료 등이 전시된 내부를 둘러봤다. 잠시 시간여행을 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속옷 밀서’ 앞에 멈췄다. 48년 정부수립 직전 북한 내 민족진영 비밀 조직원들이 김구에게 남북통일정부 수립을 탄원하는 내용이었다. 누렇게 변색된 남자 속옷 하의에는 붉은 손바닥 도장도 찍혀 있었다. 당시 민족 지도자들의 절박한 염원이 담겨 있는 듯했다.

김구는 광복 후 환국해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했고 46년엔 좌우합작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하지만 극좌와 극우의 대립 속에 좌우합작을 주장하는 민족주의자나 중도파의 목소리는 점점 외면당했다. 좌우합작을 주장했던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도 47년 극우파의 손에 암살된 뒤였다. 속옷 밀서를 받은 김구는 48년 4월 19일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협상을 위해 북행했다.

하지만 그는 빈손으로 돌아왔다. 같은 해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됐고 8월 15일 남한에 단독정부가 수립됐다. 임시정부를 이끌었던 김구의 심경은 어땠을까. 김구는 49년 6월 경교장 집무실에서 육군 장교 안두희의 총에 죽임을 당한다. 안두희는 김구가 남북 협상으로 사회에 혼란을 주고 공산주의자들을 자극시켜 참다못해 그를 죽였다고 주장했다.

경교장에는 서거 당시 김구가 입었던 저고리가 보관돼 있었다. 선혈이 낭자했던 흔적을 그대로 담은 채. 민족주의 정당인 한국독립당 대표로 엄항섭이 김구 장례식에서 추모사를 했다. “… 조국의 강토는 남북으로 양단되고 사상의 조류는 좌우로 분열된 채 동족상잔의 나날이 치열하고, 전도의 광명이 각각으로 희박해가되….” 경교장을 나서며 우리나라가 이때로부터 얼마나 전진했는가를 생각해봤다.

한국이 이룬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발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눈부시다고 할 수 있다. 1960년 4·19혁명,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6·10민주항쟁을 거쳐 민주적인 선거에 따라 정권 교체를 이뤄온 경제 강국이다. 그런데 어느 시기부터 반대 정파를 인정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비난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지난 주말에만 해도 광화문과 숭례문 일대에는 보수·진보 단체가 각각 주최하는 집회가 열렸다.

숭례문 앞에서는 진보단체 ‘촛불승리전환행동’이 윤석열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제15차 촛불대행진 집회를 열었다. 반대로 광화문 앞에서는 전광훈 목사가 이끄는 자유통일당 등 보수단체 지지자들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구속하라고 외쳤다. 정파 간 반목은 김구가 살았던 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취임한 지 반년밖에 안 된 윤 대통령이 물러나야 한다거나 야당의 이 대표를 구속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극소수일 것이라고 믿는다.

대다수 국민은 이 나라 안녕을 바라고 선거 결과에 승복하는 민주적인 사회 문화를 지지할 것이다. 김구는 백범일지 ‘나의 소원’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우리가 민주적인 문화의 힘을 더 키웠으면 좋겠다. 승복의 문화, 공존의 문화…. 반대 정파를 최소한으로도 존중하지 않는 태도는 우리 모두를 불행하게 한다.

강주화 미션탐사부 차장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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