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사 규명은 잊지 말고 반복 막자는 것”… 재난 매뉴얼 정비 시급

[묻힌 추모, 잊힌 사람들] 건강한 추모로 가는 길

미국 뉴욕 9·11 메모리얼 박물관 방문자들이 ‘그 시간의 기억에서 단 하루도 당신을 지울 수 없다’는 영문 시구가 새겨진 벽면 앞에서 설명을 듣는 모습. 백종우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장 제공

‘그 시간의 기억에서 단 하루도 당신을 지울 수 없다.’ 미국 뉴욕 9·11 메모리얼 박물관 입구에 영문으로 크게 새겨진 고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시 구절이다. 이 문장은 ‘잊지 않는 것’이라는 추모의 본질을 함축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숱한 참사를 경험했다. 그때마다 충격에 빠졌고 논란과 공분 속에 재발방지대책이 쏟아졌지만 대규모 인명사고는 다시 일어났다. 악순환은 왜 계속될까.

추모가 필요한 이유

박성현 4·16재단 나눔사업1팀장은 “참사(희생자)의 추모에는 그런 일이 또 반복되지 않도록 원인을 규명하는 작업도 포함된다”며 “그런데 원인 파악보다 빨리 일어서는 것, 회복하는 것에 더 초점을 맞추다 보니 재난 참사가 반복돼 왔다”고 분석했다. 앞서 한국사회는 애도와 원인 규명을 장애물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참사와 추모가 공동체에 갖는 의미는 빠르게 확장되고 있다. 김경우 부산대 공공정책학부 교수는 “사회적 재난의 피해 규모가 자연재해보다 훨씬 커지고 있다”며 “이런 참사가 재발할 우려도 계속 커지는 중”이라고 말했다. 이태원 참사의 경우 SNS 등으로 현장 상황에 간접 노출된 이들 상당수가 트라우마를 호소했다. 참사 피해자 추모가 당사자만을 위한 일이라고 한정하기는 더 어려워졌다.

최근 일련의 참사 후 추모는 희생자를 애도하고 유가족을 위로하는 동시에 공동체가 겪은 충격과 슬픔을 해소하는 기능을 해왔다. 한국사회가 고질적 병폐를 개선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한국트라우마스트레스학회장인 백종우 경희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재난을 겪으면 우리는 사회에 대한 불신과 함께 불안해진다”며 “개인과 가족에게만 해결을 맡기면 그 고통은 우리 중 누군가에게 또 반복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그래서 사회가 같이 그 일을 기억하고, 다시는 재발하지 않을 시스템을 만드는 게 모두에게 이익”이라고 말했다.

기억이 주는 위로
지난 2월 부산 금정구 부산외국어대 교내 추모공원에서 진행된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붕괴사고 희생자 8주기 추모식. 부산외대 제공

잘 봉합된 참사는 남은 이들에게 앞으로 나아갈 힘을 주기도 한다. 2014년 2월 경북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붕괴 사고로 대학생 딸 혜륜이를 떠나보낸 고계석(57)씨는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이 아프지만 한편으론 “(딸이) 자랑스럽다”고 말할 수 있게 됐다. “지금은 어느 정도 안정이 됐어요. (딸을) 편안하게 보내줘야 되고, 내가 잘살아야 집사람이나 애(자식)들한테 힘을 줄 수 있으니까.” 고씨는 선교사가 꿈이었던 딸을 대신해 모교인 부산외대에 기부하고 남태평양 섬나라 바누아투에 유치원을 짓는 데 보상금 전액을 내놨다.

마우나리조트 참사 1년 뒤 부산외대는 교내 도서관 인근에 추모공원을 만들고 추모비를 세웠다. 당시 리조트로 신입생 오리엔테이션(OT)을 갔던 부산외대 학생 중 9명이 숨졌다.

학교는 매년 추모식을 해오고 있다. 추모 기간에는 홈페이지에 추모 게시판을 열어 누구든 글을 쓸 수 있게 한다. 사고수습대책본부장이었던 정용각 부산외대 명예교수는 “학교는 매년 그날을 기리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며 “추모식은 계속 진행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도 참사 관련 후속 조치 및 유가족과의 소통을 맡고 있다. 백 교수는 “안타까운 사고(사건) 후에도 존중받고 기억될 수 있다는 것, 또 많은 사람이 이날을 기억해주고 있다는 것이 (유가족을 비롯한 모두에게) 큰 위로를 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숙제

전문가들은 우리 공동체가 사회적 재난을 당했을 때 함께 애도하는 법을 연습해나가는 단계라고 본다. 추모의 의미와 기능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자리 잡고, 희생자 추모를 위한 제도적 기반을 갖춰가는 과정이라는 의미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재난을 다루는 총체적 매뉴얼이다. 특히 재난 초기 대응은 직·간접적 피해자들에게 미칠 장기적 후유증의 정도를 결정하기 때문에 꼼꼼히 정비돼야 한다. 이는 신속한 재난 수습에 더해 피해자들과의 소통 및 갈등 조율을 담당할 책임자 지정, 투명한 의사소통까지를 포함한다.

추모사업 추진을 위한 가이드라인도 요구된다. 추진 주체부터 추모사업에 담을 내용과 추진 방식까지 정비해야 한다. 사회적참사특별조사위원회는 2020년 발간한 보고서에서 추모사업을 진행할 때 체계적 매뉴얼 미비로 전담 직원이 혼란을 겪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관련 법령도 마련돼야 한다. 그동안은 재난 추모사업에 관한 법규정이 거의 없어 일이 터질 때마다 특별법을 만들어 적용해 왔다. 박 팀장은 “재난 특성과 피해자 권리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바뀌고 있는 만큼 추모부터 피해자의 회복과 피해 복구 과정까지 포괄할 수 있는 형태로 재난기본법이 바뀔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갈등 조정도 중요한 과제다. 앞선 참사들은 추모공간 조성 등을 두고 논란이 빚어지며 피해자 가족의 고통을 키웠다. 백 교수는 “추모공간은 장소가 어디인지보다 그걸 결정하는 과정이 중요하다”며 “시간이 오래 걸릴 수 있는 일이지만 이해당사자 간 의견을 조율하도록 당국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진영 박장군 기자 you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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