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손의 시민 영웅들… 남녀노소가 파르티잔이었다

30만 남녀노소 민병대로 활약
적 정보 전하고 포격 정밀 유도

크리스마스이브인 24일(현지시간) 러시아군의 무차별 포격이 쏟아진 우크라이나 헤르손에서 한 시민이 다친 환자를 돕고 있다. AFP연합뉴스

흑해와 드니프로 강이 만나는 우크라이나 남부도시 헤르손은 지난 2월 말 러시아에 점령당했다가 지난달 11일 수복됐다. 우크라이나가 다시 이곳을 되찾은 배경엔 30만 헤르손 시민의 꺾이지 않는 저항이 있었다고 뉴욕타임스(NYT)가 2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남녀노소가 파르티잔(민병대원)으로 활약한 것이다.

드니프로 강가에서 50년간 어부로 살아온 발렌틴 드미트로비치 예르몰렌코(64)씨 부부가 그런 파르티잔이었다.

두 아들을 우크라이나군에 보낸 부부는 러시아군 주둔지와 병참선, 병력 규모, 무기 수준 등을 상세히 염탐해 자국군에 전달했다. 예르몰렌코씨는 자신의 낚시 보트를 이용해 취합한 정보를 우크라이나군 정찰병에게 넘겼다. 몰래 무기를 전달하는 일도 했다. 부부의 활동은 헤르손 점령 직후부터 지난달까지 9개월 내내 계속됐다. NYT는 “예르몰렌코씨 부부처럼 파르티잔이자 스파이로 활동한 헤르손 시민 다수가 러시아군을 몰아내는 일등공신이었다”고 전했다.

트럭 운전사들은 러시아로 밀가루를 유출하는데 동원되자 트럭을 파괴하고 운송을 거부했다. 젊은 남성 상당수는 ‘러시아군 저격부대’ ‘주둔지 파괴부대’를 결성해 무장투쟁을 벌였고, 여성과 노약자들은 러시아군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기록해 우크라이나 정보부대에 넘기는 스파이가 됐다. 낮에는 평범한 시민으로 출근하거나 농부·어부로 지내다 밤이 되면 비정규군으로 활동한 것이다.

이들을 단결시킨 건 러시아의 폭압이었다. 러시아는 헤르손 점령 직후 크림반도의 러시아인을 대거 이주시켰다. 주민투표를 조작해 헤르손주 전체를 병합했다. 우크라이나 화폐 대신 러시아 루블화, 우크라이나 상품 대신 러시아 상품이 밀려 들어왔다. 헤르손항구로 집적된 우크라이나산 밀가루는 러시아로 밀반출됐다.

백만장자인 미하일 예브미노우씨는 파르티잔에게 막대한 군수자금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러시아 편에 서면 편안한 삶을 이어갈 수 있었지만 조국을 택한 것이다.

헤르손 파르티잔은 점령 기간 내내 사건을 일으켰다. 러시아군 고위장교와 우크라이나인 매국노를 저격하고, 대규모 병참기지에 대한 우크라이나군 포격을 정밀 유도하기도 했다. 지난 4월엔 헤르손 시내 전역의 가로수와 전봇대에 ‘우크라이나에게 승리를(Slavo Ukraina)’라고 쓰인 노란 리본 수만 장을 내걸었다.

NYT는 “헤르손 시민 전체가 우크라이나군 정보부대와 텔레그램을 통해 수시로 정보를 교환하며 비정규전을 끊임없이 지속했다”면서 “전쟁 초기 마리우폴 철강소를 사수하며 포로가 될 때까지 싸웠던 아조프연대와 함께 이들은 우크라이나군의 ‘이름 없는’ 전쟁 영웅으로 떠올랐다”고 전했다.

예르몰렌코씨는 NYT와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 정부가 단 한 번도 만족스러운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내 조국”이라면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조국이 바뀌진 않는다”고 말했다.

신창호 선임기자 procol@kmib.co.kr

GoodNews paper ⓒ 국민일보(www.kmib.co.kr),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국민일보 신문구독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