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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태원의 메디컬 인사이드] 환자와 소통 넓히는 새해 되길


얼마 전 병원단체 주최 국제학술대회에서 ‘환자의 목소리’ 분과 좌장을 맡아 진행한 적이 있다. 200석 가까운 대회장이 가득찼고 참석자들은 영상으로 보여진 환자들의 절절한 사연과 고충, 병원·의료진에 바라는 점 등에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뇨병 등 만성질환자들이 생각하는 환자중심의료에 대한 현직 환자단체장의 강연도 큰 호응을 얻었다. 환자가 일반 소비자와 어떻게 다른지, 환자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깨닫는 의미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런데 올해 13회째를 맞은 이런 큰 행사에 환자 소통 프로그램이 마련된 것이 처음이라고 해서 아연했다. 몇 년 전부터 의료계가 환자중심의료를 강조하고 있는데, 말로만 외쳤던 게 아닌가 싶다. 환자중심의료는 의사와 환자의 파트너십을 강조한 개념으로, 진료 과정에서 환자의 건강 요구나 개인 선호, 가치를 적극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환자들이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이 뭔지를 제대로 들어야 하는데, 병원들이 진정성 있게 소통하려는 자세와 노력을 다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영상에 등장한 한 청년 암환자는 “20·30대 MZ세대 암환자들이 늘고 있지만 병원에 또래 암환자를 위한 참여 프로그램은 물론 이야기할 수 있는 창구도 없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우리 의료계에는 의사가 갑이고 환자는 을인 권위주의적이고 일방적인 의사결정 관례가 여전히 남아 있어 소통의 장벽이 되고 있다. 물론 30분 대기, 3분 진료를 강요하는 고질적인 의료 시스템도 한 요인이다.

한국과 달리 해외에선 보건의료 관련 학술단체 행사나 병원에 환자 참여와 소통 프로그램이 활성화돼 있다. 미국임상종양학회(ASCO)는 ‘암 정복을 위한 환자단체 장학금’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이는 ASCO 후원 심포지엄과 연례회의에 특별히 환자 라운지를 마련하고 환자나 환자단체의 참여 경비를 지원하는 것이다. 유럽에도 오래전부터 환자 역량 강화 교육과 연구개발 과정에 환자단체 참여를 지원하는 프로그램(EUPATI)이 있어 왔다. 그간 국내 학술행사에 이런 환자 참여 공간과 기회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던 점은 아쉬운 대목이다.

미국 앰디앤드슨이나 메이요클리닉 등 유수의 병원들은 보다 원활하고 효율적인 환자 커뮤니케이션을 위해 ‘Patient Navigator(PN)’라는 일종의 환자 도우미 제도를 갖고 있다. PN들은 의료진의 치료 외에 환자의 의료비 지원이나 치료비 마련 보험, 질병 교육 등을 가이드하고 최적화된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움 주는 역할을 한다. 비영리환자단체인 미국암협회(ACS)와 협력으로 도우미를 고용해 환자와의 소통을 돕고 병원·의료진은 진료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있다. PN 고용 비용은 기업 후원금을 통해 충당한다. 짧은 시간에 많은 환자를 봐야 하는 우리나라 의료 환경에서 도입을 고려해 볼 수 있는 제도라고 생각된다.

환자와의 소통이 힘들기는 행정관청도 마찬가지다. ‘민원 핑퐁’과 ‘전화 뺑뺑이’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환자들이 정부 부처의 민원 담당부서와 담당자를 찾는 속터지는 과정의 어려움을 극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환자의 고충을 어떻게든 해결해 주려는 적극 행정은 찾아보기 어렵고 서로 자기 일 아니라고 미루며 나 몰라라 하는 책임 회피와 소극적 행정에서 비롯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원포인트로 접촉할 수 있는 부처 내 환자 담당 부서의 지정이 절실하다. 현재 보건의료 분야 정부 부처 중 식품의약품안전처 정도만 환자 소통 조직을 꾸리고 있다.

환자들은 세상에서 자신이 가장 아프다고 생각하는 존재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우선 자신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달라는 것이지 않을까.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의료계와 정부 모두 환자와의 소통을 넓히는 새해가 됐으면 한다.

민태원 의학전문기자 twmi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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