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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김영걸 (5) 나는 교회의 아들… 교회는 내 인생 출발점이자 바탕

마을 주민 모두가 성도인 덕수리 교회
처음 만난 공동체이자 세상이고 사회
교회학교와 여러 행사들 통해 꿈 키워

김영걸(왼쪽 세 번째) 목사가 초등학교 3학년 때 경기도 양평 덕수리교회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가 6살 때 우리 가족은 경기도 광주를 떠나게 됐다. 가나안고아원 원목이던 아버지가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덕수리에 있는 덕수리교회에서 사역하게 되면서다. 할머니는 가나안교회에 남기로 했다.

덕수리로 이사하던 날이 생각난다. 당시 가나안고아원엔 지프차가 있었고 그 뒤에는 화물칸을 연결할 수 있는 장치가 있었다. 화물칸에 우리 가족의 짐을 모두 싣고 출발했다. 손수레보다 고작 2~3배 큰 화물칸에 모든 짐을 다 실을 수 있었으니 얼마나 단출한 전도사 가정의 살림이었는지 모른다.

우리 가족은 덕수리에 도착해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이곳에서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살았다. 덕수리는 내 유년 시절 추억이 가장 많이 남은 곳이다.

덕수리는 단월면과 부안리 사이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 입구에 있는 큰 느티나무는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그리고 그 옆에 덕수리교회가 있었다. 덕수리의 특징은 모든 마을 사람들이 교회에 나왔다는 것이다. 동네 사람들이 곧 교회 성도들이었다. 어릴 적에는 이런 상황이 당연한 줄 알았다. 동네 아무 집에 들어가도 집사님 댁이었다. 놀다가 배고프면 근처 집에 들어가 밥을 얻어먹을 정도였다.

마을 옆에는 하천이 흐르고 있었는데 무척 맑았다. 피라미처럼 1급수에서 살 수 있는 물고기를 쉽게 볼 수 있었다. 한여름에도 그 하천에 들어가면 너무 차가워 얼마 견디지 못했다. 그 맑은 덕수리 하천에서 여름에 옷을 벗고 친구들과 수영하며 놀던 시절이 생각난다.

덕수리에는 초등학교가 없어서 나는 마을에서 3㎞ 정도 떨어진 부안초등학교에 다녔다. 덕수리에 살던 친구들 모두 아침에 걸어서 학교에 갔다. 동네 아이들과 학교에서도 만나고 교회에서도 만났다. 그 친구들과 얼마나 정이 들었는지 지금도 당시 친구들과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 태석이 종순이 상애 옥분이 모두 집사와 권사가 되고 또 장로의 부인이 돼 교회를 잘 섬기고 있다.

덕수리교회 여름성경학교와 성탄절은 아이들에게 가장 큰 행사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시골교회에서 대단한 행사를 한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여름성경학교에 참가해 ‘흰 구름 뭉개 뭉개 피는 하늘에’라는 찬양을 얼마나 힘차게 불렀는지 모른다. 그 시절 여름성경학교를 할 때마다 하늘에 진짜 흰 구름이 뭉개 뭉개 폈다. 가끔 서울 교회 성도들이 이곳으로 봉사하러 올 때도 있었다. 그럴 땐 더 신이 났다. 나는 어릴 적부터 교회학교와 여름성경학교를 통해 꿈을 키워왔던 것이다.

성탄절 역시 손꼽아 기다리던 교회 행사였다. 그중에서도 새벽송이 가장 즐거웠다. 어른들과 눈길을 헤치고 집집마다 방문해서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부르곤 했다.

교회는 내 인생에서 처음 만난 공동체이자 세상이고 사회였다. 나는 교회에서 사랑과 섬김을 배웠다. 교회가 세상 전부인 줄 알았고, 세상 모든 사람이 교회 성도들처럼 선하게 살아가는 줄 알았다.

교회를 빼놓고는 내 인생과 삶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 교회는 나에게 부모와도 같은 곳이었고 나는 교회의 아들이었다. 교회는 내 인생의 출발점이자 바탕이 됐다.

정리=박용미 기자 m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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