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진 “노동유연화 필요성”… 종사자 “노동시간 증가 우려”

게임업계, 크런치 모드 등 ‘근로시간 개편’에 대한 뚜렷한 시각차


‘노동유연화’라는 말의 무게는 업계마다 다르다. 과로에 시달리는 제조업은 주 52시간제도 빠듯하다. 하지만 게임 개발을 앞두고 바짝 일해야 하는 개발자들은 시기에 따라 업무 강도를 조절하는 게 요긴할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신년사를 통해 노동 유연화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게임 개발을 예로 들었다. 윤 대통령은 과거 대선을 앞두고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게임 하나 개발하려면 한 주에 52시간이 아니라 일주일에 120시간이라도 바짝 일하고 이후에 마음껏 쉴 수 있어야 한다”며 ‘크런치 모드’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크런치 모드란 게임 등 소프트웨어 개발 업계에서 마감을 앞두고 수면, 사회활동, 위생 등을 희생하며 장시간 근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바라보는 게임 업계의 시각은 어떨까.

“유연화는 OK, 혹사는 NO”

지난달 미래노동시장연구회는 근로 시간 개편 등의 내용을 담은 개혁안을 정부에 권고했다. 현재 근로기준법은 ‘주 최대 52시간제(기본 40시간+연장 12시간)’를 채택하고 있다. 권고안은 주 40시간 일하는 현행 제도를 유지하되, 연장근로시간을 월·분기·반기·연 단위로 유연하게 관리하자고 제안한다.

경영진은 대체로 유연화가 필요하단 입장이다. 한 게임사 고위 관계자 A씨는 “개발자들과 얘기해보면 (근로 시간에) 융통성이 없어 불편하다는 의견이 있다”면서 “개발자는 게임에 대한 애정이 굉장히 크기 때문에 업데이트나 중요한 개발 프로젝트가 있을 때 시간을 더 할애하고 싶어한다”고 했다.

또 다른 게임사 고위 관계자 B씨는 “(출시 전) 마지막 단계에서 노동 집약적으로 일을 해야하고, 협업도 요구된다. 그 특성을 고려할 때 필요할 때는 많이, 아닐 때는 적게 일하는 유연함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정부가 ‘크런치 모드’를 합법화하는 노동유연화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방침을 밝히면서 게임 업계에선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사진은 주요 게임사들이 자리잡고 있는 판교테크노밸리의 유스페이스 광장. 연합뉴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공개한 ‘게임산업 종사자 노동환경 실태조사’에 따르면 2021년 기준 게임 업계 종사자는 주 5일, 평균 41.3시간 근무했다. 크런치 모드 발생 여부는 15.4% 수준이다. 300인 이상의 대형 개발사에선 0.5%만이 크런치 모드를 경험했지만 5인 미만의 개발사에선 48.3%로 크게 뛰었다. 해당 조사에서 종사자는 30.5%, 사업체는 44.6%가 크런치 모드가 ‘다소 필요하다’고 답했다. 필요성에 ‘보통’이라고 답한 종사자는 47.1%, 사업체는 31.4%였다.

A씨와 B씨는 입을 모아 ‘개발의 특수성’을 강조했다. B씨는 “프로젝트 완성 막바지에는 52시간이 부족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개발 초기와 같은 일상적인 시기에는 주 40시간도 충분하다”고 설명했다. 다만 유연화 정책이 악용되지 않도록 적절한 장치가 필요하다는 데에 두 사람은 공감했다. B씨는 “총량을 잘 지키고, 쉬는 시간도 충분히 줘야 한다”며 “근무 시간을 과도하게 측정하는 경우가 없도록 관리 감독도 잘해야 한다”고 말했다.

야근 상시화 우려… 포괄임금제 폐지 주장

‘야근 상시화 정책’으로 변질할까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배수찬 넥슨 노조지회장은 “우려되는 부분은 평균 노동 시간이 증가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현행 52시간제 내에서 근로자가 근무시간을 자유롭게 조정하는 ‘선택적 근로시간제’로도 충분히 유연한 근무가 가능하다고 봤다. 배 지회장은 “이미 유연한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쓰고 있는데, 더 유연해질 부분이 없다”고 평가했다.

게임 업계 출신인 류호정 의원은 ‘노동자 건강 악화’를 부작용으로 꼽았다. 류 의원은 52시간제에서도 과로가 발생할 수 있다며, 실제로 일어났던 IT업계 과로사를 언급했다. 크런치 모드에 대해선 “한정된 시간 내에 결과물을 만들어야 하고, 그게 소위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졌다”고 지적했다. 류 의원은 이번 정책이 “IT업계 핑계를 대는 게 맞다”며 “장시간 노동 도입은 일단 접어두고 포괄임금제 폐지 논의부터 시작하자”고 강조했다. 포괄임금제는 근로계약을 체결할 때 연장, 야간, 휴일근로 등을 미리 정해 예정된 수당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류 의원은 지난해 전반기 국회에서 포괄임금제 폐지 법안을 발의했다.

이병훈 중앙대 사회학 교수도 ‘야근의 상시화’를 우려했다. 특히 노동조합이 아예 없거나 노조가 힘을 못 쓰는 경우 법의 사각지대에서 연장근로가 강요될 수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바쁜 시간에 오래 일하더라도 그만큼 상대적으로 덜 일할 수 있는 조건도 보장해줘야 한다”며 “근무 총량을 지키기 위해 노사 감독이나 고용노동부의 현장 근로감독이 잘 지켜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이 교수는 IT업계의 크런치 모드에 대해 “비현실적인 의견일 수 있지만, 서구와 비교하면 인력 투입이 제한적인 것도 연관이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과중한 일을 한다는 얘기는 그만큼 제한된 인원에게 더 많은 일을 요구하기 때문이 아닐까”라고 부연했다.

키워드
크런치 모드= 게임 등 소프트웨어 개발 업계에서 마감을 앞두고 수면, 사회활동, 위생 등을 희생하며 장시간 근무하는 것을 의미한다.


정진솔 인턴 기자 so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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