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한방” 악마의 유혹… 투전판으로 전락한 ‘밈’주식

실적은 뒷전 입소문 타고 급등락
하룻밤 새 두배 올랐다가 반토막
혈투 끝나면 개미들 사체만 수북

올 초 미국 증권시장이 강세장을 보이면서 ‘밈 주식’이 요동치고 있다. ‘레딧’에서 주식 투자자들을 상징하는 캐릭터. 레딧 홈페이지 캡처

미국 뉴욕증시에서 힘을 받은 종목은 코스피·코스닥시장의 상·하한가를 가뿐하게 뛰어넘는다. 1주일 전인 지난달 28일(한국시간) 뉴욕증시에서 환호와 좌절을 동시에 끌어낸 ‘슈퍼스타’는 미국 전기자동차 스타트업 루시드그룹이었다. 8.99달러에서 출발한 주가는 그날 새벽 2시부터 불과 100분 만에 17.8달러까지 도달했다. 상승률 97.9%. 큰 변동성에 거래가 12차례나 중단됐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영국의 한 주식 블로그에 올라온 소문이 루시드의 급등을 촉발했다. 자신을 ‘인수합병(M&A) 시장 전문가’라고 소개한 영국인 벤 헤링턴은 블로그 ‘베타빌’에 “사우디아라비아 국부펀드(PIF)가 루시드 지분을 모두 사들여 뉴욕증시에서 상장폐지하는 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적었다. PIF는 루시드 지분 65%를 보유한 최대 주주다. PIF가 나머지 지분을 매입한다는 소문은 미국 최대 인터넷 커뮤니티 사이트 ‘레딧’으로 흘러 들어갔고, SNS를 타고 월스트리트 전역에 퍼졌다.

루시드를 향한 월스트리트 경제지들의 질문이 빗발쳤다. 루시드는 “소문이나 추측에 대응하지 않겠다”는 간결한 입장을 냈다. 이런 대응이 주식 호가창을 다시 흔들었다. 루시드는 17.8달러에서 30분 만에 11.8달러까지 33.4%나 추락했다. 그렇게 반등과 조정을 반복해 결정된 마감 종가는 12.87달러. 시초가보다 43%나 올라갔지만, 그 위로 100%에 근접했던 일간 상승률의 고점까지 ‘개미’들의 시체가 수북이 쌓였다. 루시드의 당일 거래량은 뉴욕증시 전체를 통틀어 여섯 번째로 많았다.

최근 두 자릿수 비율로 급등락한 전기차 기업 루시드그룹은 2020년 6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본사에서 시제품을 공개했다. AP뉴시스

루시드는 지난해 레딧에서 수도 없이 언급된 ‘밈(meme) 주식’ 중 하나다. ‘밈’은 인터넷상에서 맥락 없이 형성돼 인기를 끌게 된 문화 요소를 뜻한다. 레딧 회원들이 2021년 1월 미국 게임업체 게임스톱을 폭락시킨 공매도 세력에 대항해 주가를 끌어올린 ‘숏 스퀴즈 사건’이 주식 투자를 인터넷 문화 현상으로 끌고 온 밈 주식의 출발점으로 꼽힌다.

루시드는 2020년 9월 미국 나스닥거래소에 상장되자마자 ‘제2의 테슬라’ ‘테슬라와 페라리의 결합’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투자금을 빨아들였다. 레딧에서 유독 자주 언급돼 밈 주식 관련 상장지수펀드(ETF) 시장에서 인기가 좋았다. 소셜미디어의 정서를 기반으로 포트폴리오를 구성한 ETF ‘BUZZ’에서 루시드는 4.36%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실제 이 회사는 2021년 10월에야 처음 출고한 차량을 고객에게 인도한 신생 기업이다. 한 대당 2억~3억원짜리 고급 세단에 희소성을 덧씌웠지만, 양산 능력을 갖추지 못한 한계도 존재한다. 루시드 간판 모델인 ‘루시드 에어’의 지난해 고객 인도량은 4369대에 불과했다. 분기마다 적자를 발표하는 루시드의 적정 주가를 놓고 월스트리트 투자은행들 사이에서 5달러부터 21달러까지 추정치가 크게 엇갈린다. 이런 루시드 주가의 올해 첫 급등락은 레딧 회원들의 흥분을 끌어낼 만했다.

올해 나타난 상승장에서 루시드 같은 밈 주식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의 밈 주식 투자는 부실한 실적에도 선동이나 소문으로 주가를 정하는 ‘투전판’으로 전락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밈 주식 대표주로 손꼽히는 가정용 생활용품 소매점 체인 베드배스앤드비욘드의 미국 일리노이주 샴버그 매장 정문 모습. AP뉴시스

미국 가정용 생활용품 소매점 체인 베드배스앤드비욘드(BBBY)는 올해 밈 주식의 대표주로 꼽힌다. 이 기업은 파산신청을 검토하던 지난달 10일부터 3거래일간 192%나 폭등했다. 하지만 같은 달 27일 “부채를 갚을 재원이 충분치 않다”고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에 공시한 뒤 22% 급락했다.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된 홍콩계 핀테크 기업 AMTD디지털은 지난해 7월 100달러를 밑돌던 주가를 불과 5거래일 만에 25배로 끌어올렸다. 상승의 원인은 종목 코드인 ‘HKD’에 있었다. 당시 강세를 나타낸 홍콩달러의 단위와 같다는 이유로 레딧 회원들의 선택을 받았다. 주가는 1개월 뒤 제자리로 돌아갔다.

문제는 이런 밈 주식의 변동성을 좇은 한국 투자자들의 거래액이 수천억원 단위로 늘어난 점에 있다.

한국예탁결제원 증권정보 포털 세이브로를 보면, 한국 투자자들은 루시드 주식을 지난해 14억2700만 달러(약 1조7600억원)어치나 매수했다. 연간 해외 주식 매수액 10위, ETF를 제외한 단일 종목으로는 6위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한국 투자자들이 지난달에만 베드배스앤드비욘드를 사들인 금액은 1000억원에 달한다.

지난달 25일 미래에셋증권 대치WM에서 만난 최홍석 선임매니저는 “밈 주식의 주가가 기업 실적이나 성장성보다 시장에 풀린 유동성의 크기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며 “올해 경기 둔화의 저점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일부 조정 구간이 찾아오면 밈 주식의 하락이 더 선명하게 나타날 수 있다”고 말했다.

올해 초부터 성장성을 추종하는 장세가 펼쳐졌지만, 지난해 하락장에서도 손실을 줄여온 대규모 투자자들은 우량주를 선호한다. 서울 강남권에서 수천억원대 고객 자산을 운용하는 최 선임매니저는 “올해 고객 포트폴리오도 시가총액 상위 기업들로 구성돼 있다”고 했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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