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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쓴 위안소… “육군성이 긴급히 콘돔을 공수했다”

[책과 길] 진중일지로 본 일본군 위안소
하종문 지음, 휴머니스트, 728쪽, 3만5000원

1938년 1월 10일 중국 전장에 발을 디딘 일본군 제3사단 소속 보병 제68연대 제3대대의 2월 진중일지에 나오는 ‘위안소 배치도.’ 당시 전장의 위안소는 계획 중인 곳을 포함해 총 8곳이 있었다. 휴머니스트 제공

일본군 진중일지는 중대 이상의 부대가 동원령을 수령한 날부터 의무적으로 작성한 공식 기록물이다. 많은 진중일지가 패전을 전후해 조직적으로 소각되었으며 전투 중 망실된 경우도 많다. 하지만 일본 육군성에서 보관하던 것, 개인이 소장하다가 방위연구소에 기증한 것, 연합군이 노획했다가 반환한 것 등이 남아있다.

진중일지에서 위안부 개인이 언급되는 일은 매우 드물지만 위안소에 관한 기술은 적지않다. 진중일지에 대한 몇몇 선구적 연구는 위안소 기록을 소개함으로써 위안소의 실재를 밝히는 증거물로 사용했다. 하종문 한신대 일본학과교수가 쓴 ‘진중일지로 본 일본군 위안소’는 전황, 부대의 움직임과 위안소 관련 기록을 매치시켜서 위안소가 일본군의 조직 체계와 작전에 깊숙이 결부된 군사시설이었음을 논증한다.

중일전쟁 시기 상하이에 파견된 일본군 제6여단 제14연대의 진중일지를 보자. 14연대는 1938년 1월 6일 상하이 베이차오진으로 이동을 완료하고, 13일에 위안소 설치와 관리를 담당할 ‘위안회’ 위원을 임명했다. 26일에는 ‘위안회장’ 설치 공사의 사역 인원으로 하사관 2명과 병 10명을 차출했다. 27일에는 “오늘부터 별지 규정에 따라 위안회장을 개설하다”는 여단장 발표가 있었다. 여기서 ‘별지 규정’이란 ‘위안소규정’을 말한다. 위안소를 개설한 부대는 이용시간과 요금은 물론 각종 금지 행위를 규정한 ‘위안소규정’과 이를 세세하게 정리한 ‘특수위안소취체규정’을 만들었다.

함께 상하이에 파견된 제3사단 5여단 68연대 3대대의 진중일지를 보면, 보병 5여단 주둔지였던 전장에 8곳의 위안소가 있고 위안부는 총 139명이었다. 제3사단 독립공성중포병 2대대의 진중일지에는 12월 29일 창저우에 도착했고, 이듬해 1월 9일 주둔지 부근에 ‘오락장’이 열렸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군 진중일지의 표지. 휴머니스트 제공

진중일지의 위안소 관련 기록들은 위안소가 부대의 운용이라는 틀 속에서 계획되고 실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이 책은 난징 위안소 개설을 앞두고 육군성이 긴급히 100만개의 콘돔을 공수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내기도 했다. 책은 1931년 만주사변부터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거쳐 종전에 이르기까지 여러 부대의 진중일지를 분석하면서 전쟁의 전개와 부대의 움직임 속에서 위안소 시스템이 어떻게 운영되고 변해가는지 묘사한다.

만주사변 단계에서 민간 성매매업소를 이른바 ‘군 이용’ 형태의 위안소로 전용하는 체계가 갖춰졌다. 이때부터 병사들의 성매매업소 출입은 휴무 및 외출과 결부돼 행해졌다. 하지만 당시 ‘화류병’이라고 불렀던 성병이 만연해 통상적인 성매매업소가 아니라 군이 주도하고 통제하는 위안시설을 운용할 필요가 생겨났다.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고 12월 난징 함락에 나선 중지나방면군은 예하 상하이파견군을 위한 난징 위안소 설치를 지시했다. 이것이 위안소 빅뱅의 시작이었다.

기존에 발굴된 자료에 따르면, 중지나방면군이 위안소 설치를 결정하면서 12월 중순 상하이총영사, 육군 무관실장, 헌병대사령관이 모여 위안부 동원과 위안소 설치에 관한 주요 방침을 확정했다. 일본 본토와 조선을 여행하며 업자와 위안부를 모집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사관에서 신분증명서를 발행해 편의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했다. 업자와 위안부는 상하이 도착 후 곧바로 헌병대에 넘겨졌고, 헌병대는 이들이 전선까지 이동하는 과정을 책임졌다. 모집한 위안부를 중국으로 이송하는 데는 군용선이 투입됐다.

중일전쟁 이후 각 부대는 군의 공식적인 법령과 규정을 토대로 위안소를 설치하고 운영해나갔다. 일본 육군의 내부 행정명령인 ‘야전주보규정’에는 “야전주보에 위안시설을 둘 수 있다”는 구절이 1937년 새로 추가됐다. ‘주보’는 매점(PX)이며, ‘야전주보’는 전지의 물품판매소를 말한다.

“일본군의 독창적인 위안소 시스템은 만주사변 시기에 출현하여 중일전쟁 발발을 계기로 정교해지고 체계화되었으며, 아시아·태평양전쟁 이후 동남아와 태평양 전선 각지에서 전면적으로 펼쳐졌다. 마지막으로 일본 본토에서의 유일한 지상전이었던 오키나와 전투에 즈음해서는 완성 단계를 맞게 된다.”

전쟁이 끝나가는 무렵 오키나와에 주둔한 62사단이 작성한 ‘62회보’에는 위안소에 등화 재료의 배급을 주의하라는 내용과 함께 “등화관제는 군시설이라면 예외가 없어야 하므로 주의할 것”이라는 구절이 있다. 특히 오키다이토섬에 진주한 다이토수비대(36연대)는 미군 상륙이 임박하자 섬의 모든 민간인을 퇴거시키면서도 상부명령에 따라 위안부를 잔류시켰다. 저자는 “군시설로서의 위안소에 더해 위안부 또한 ‘군의 요원’으로도 간주되기에 이른 것”이라며 “일본군 위안소의 본질이 무엇인지는 명명백백하다”고 썼다.


책은 만주, 상하이, 창저우, 우한, 광둥, 칭다오, 타이완 등 중국 지역은 물론이고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버마, 필리핀, 인도네시아, 일본 오키나와 등 일본군이 주둔한 지역마다 거의 동일한 방식으로 위안소가 설치, 운영됐음을 진중일지 기록으로 보여준다.

이 책은 위안부 대신 위안소를 조준하며 정체된 위안부 논의에 돌파구를 내고자 한다. 위안부 강제 동원을 부정하는 일본을 향해 이런 시스템을 만든 책임은 어디 갔는가 따지는 듯 하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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