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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망진창된 영국 의료보험… NHS마저 파산 위기

세계 최초 ‘공공 의료보험’ 도입
노령인구 늘고 관련 예산 준 데다
코로나 발생하자 재정 최악으로
정상적인 의료 서비스 여력 상실

영국 국민건강서비스(NHS) 소속 간호사들이 6일(현지시간) 런던 세인트토머스 종합병원 앞에서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한 간호사가 “환자들은 아픈데, 우리는 과로에 허덕이고 있다”고 쓰인 팻말을 들고 있다. 간호사와 응급대원 대다수가 참가한 이날 시위는 NHS 사상 최대 규모였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로이터연합뉴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6년 영국 노동당 정부는 ‘요람에서 무덤까지(From Cradle To Grave)’라는 구호와 함께 국민건강서비스(National Health Service·NHS)를 전 국민에게 적용했다. 세계 최초의 공공 의료보험인 NHS는 모든 국민의 질병을 국가가 100% 책임지는 제도다. 현대적 사회복지의 핵심 구호와 제도의 기원인 셈이다.

그런 NHS가 77년 만에 파산 위기에 내몰렸다. 계속되는 만성 적자에 노령인구 급증, 정부의 관련 예산 축소로 제대로 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여력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6일(현지시간) “서구사회에서 제일 먼저 공적 의료보험제도를 실시한 NHS가 더 이상 영국인들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는 지경에 내몰렸다”고 보도했다.

신문에 따르면 현재 영국에서 심장마비가 발생하면 평균 1시간30분을 기다려야 구급차에 실려 병원에 도착할 수 있다. 이미 사망한 상태에서 병원에 도착한다는 뜻이다. 고관절 교체처럼 ‘응급은 아니지만 반드시 수술 등 의료적 처치가 필요한 질환’을 앓는 영국인 710만명은 환자 등록만 한 상태로 무한정 기다려야 하는 실정이다. NHS 가입자 10명 중 1명꼴로 짧게는 몇 달, 길게는 10년까지 의료진 치료를 기다린다는 것이다.

영국 공공의료가 마비된 것은 한두 해의 문제가 아니다. NHS 재정은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전 총리가 집권했던 1980년대 초반부터 적자 상태였다. NHS는 돈을 아끼기 위해 전국 병원의 의료 서비스를 하나하나 감시해 ‘꼭 필요한 수술이나 처치’가 아니면 제공하지 못하게 한다. 모든 병원이 이윤을 추구하지 않는 공공병원이어서 처음부터 의료 서비스 질도 높지 않았다.

이런 상태에서 2020년 초 발생한 코로나19 팬데믹은 NHS 재정을 최악으로 치닫게 했다. 모든 국민에게 무료로 코로나 백신을 제공하고 중증 감염환자를 무상으로 치료해야 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인구 노령화도 NHS를 막다른 골목으로 끌고 갔다. 출산율이 높았던 50·60·70년대 태어난 ‘베이비부머’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자녀를 덜 낳아 현재의 ‘인구 절벽’을 만들었다. 건강보험료를 내는 젊은 생산인구는 크게 감소한 반면 성인 만성질환, 중증질환을 지녔지만 보험료를 내지 않는 노령인구가 급증하니 NHS 재정은 더 나빠졌다.

지난해 NHS 통계에 따르면 전국 병원의 잉여 병상률은 단 2%에 불과했다. 병상 100개 가운데 98개가 만성질환을 앓는 노령자들에 의해 점령돼 있다는 의미다.

의료진도 턱없이 부족하다. 인구 1000명당 의사 숫자는 2.9명으로 유럽연합(EU) 평균인 3.7명보다 훨씬 적다. 영리 병원 위주인 미국의 2.6명보다 조금 많은 수준이다.

영국 정부의 NHS 관련 예산도 크게 감소하고 있다. 2010년 이후 이어져 온 보수당 정권의 거듭된 감세 정책으로 국가재정이 악화하자 NHS 예산도 줄어들기 시작했다. 올해 NHS 예산 증가율은 2.9%다. 매년 3.4%가 올랐던 지난 77년간에 비해 실질적으로 0.5% 포인트 깎인 셈이다.

2020년 코로나 팬데믹이 시작됐을 때 보리스 존슨 전 총리는 NHS에 예산을 쏟아부었지만 이 돈은 코로나 백신 접종과 감염자 치료에 소진됐을 뿐 기존 다른 질환자 치료에는 한 푼도 쓰이지 못했다.

NHS가 간호사와 응급대원 등에게 초과근로수당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자 이들은 파업에 돌입하고 거리로 나서 시위를 벌이고 있다. 지난달부터 파업을 계속해 온 이들은 6일 전원이 참가하는 NHS 사상 최대 규모의 파업 시위를 벌였다.

나이절 에드워즈 전 NHS 처장은 “평생 NHS에 헌신했지만 의료시스템 전체가 이처럼 엄청난 위기에 내몰린 건 처음 본다”면서 “‘값싼 의료비’만 추구하느라 효율성과 적절한 의료서비스 제공을 포기했던 우리 스스로가 자초한 일”이라고 말했다.

WSJ는 “NHS의 파산 위기는 공공 의료보험제도를 채택한 국가 전체에 대한 타산지석”이라면서 “똑같은 노령인구 급증과 의료재정 고갈 사태를 겪는 서방 선진국은 시급히 건강보험제도 개혁에 나서야 한다”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무조건 의료비만 낮추는 방향으로 공공 건강보험이 운영되면 결국 NHS의 운명을 맞게 된다”고 전했다.

신창호 선임기자 proco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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