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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로 모이게 한 뒤 총격, 명백한 전쟁범죄” 첫 판결

법원, 베트남전 학살 정부 책임 인정
군사협정 내세웠지만 “합의 불과”
원고 측 “대한민국 국격 높인 판결”

뉴시스

법원은 7일 55년 전 베트남전쟁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손을 들어주며 ‘퐁니·퐁넛마을 학살사건’(퐁니 사건)은 실재했다고 인정했다. ‘민간인 학살은 없었다’는 정부 입장을 뒤집은 것이다. 과거에도 살인이나 강간 등 한국군의 베트남 민간인 상대 개별 범죄에 대한 형사 처벌은 있었다. 하지만 한국군이 작전 수행 중 특정집단에 가한 전쟁 범죄에 대한 우리 정부 책임이 인정된 건 처음이다.

재판부는 응우옌 티탄(63·사진)씨 등 퐁니 사건 생존자와 당시 마을 민병대원, 베트남전 참전 한국 군인 등의 법정 증언과 미군의 사건 보고서 등 여러 증거를 기반으로 학살 의혹을 사실로 판단했다. 응우옌씨는 지난해 8월 한국 법정에 직접 출석해 한국군이 집안에 들어와 비무장 상태로 방공호에 숨어 있는 자신과 가족에게 수류탄을 꺼내 보이며 밖으로 나올 것을 위협했다고 증언했었다.

사건 목격자인 응우옌씨 삼촌도 한국군이 주민들을 한곳에 몰아넣고 총을 쏘는 모습, 집을 불태우는 모습을 마을에서 300m 떨어진 민병대 초소에서 망원경으로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그들이 위장한 베트콩이 아닌 한국인들이라는 것을 어떻게 식별했느냐”는 재판장 질문에 그는 “쌍꺼풀 없는 눈과 얼굴을 보고 구별했다”고 답했다.

재판부는 “당시 해병 제2여단 1중대 군인들이 원고 가족들을 밖으로 나오게 한 뒤 총격을 가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밝혔다. 응우옌씨 모친이 같은 날 마을의 다른 곳에서 민간인 학살 피해자가 됐다는 점도 함께 언급했다. 응우옌씨 대리인은 “원고와 밀접한 가족(모친)이 당한 인권침해까지 적시하면서 원고의 정신적 피해도 위자료 책정에 반영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정부는 소송 과정에서 베트남전 당시 한국·미국·월남·월맹 군 당국이 민간인 피해 구제과 관련해 맺은 여러 군사협정을 근거로 베트남인이 군 당국 소청 절차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한국 법원에 소송을 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재판부는 “군 당국 사이 약정서는 합의에 불과하다”며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회 동의를 거치지 않은 실무 협약은 효력이 제한적이라는 취지다. 재판부는 또 한국 국민이 베트남 현지에서 베트남 공무원의 업무로 손해를 입었을 때 베트남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낼 수 있듯 응우옌씨 역시 한국을 상대로 소송을 낼 수 있다고 봤다.


응우옌씨는 2015년 처음 얼굴을 공개하고 한국 정부와 베트남전 참전 군인들에게 사과를 요구했다. 2019년 4월에는 학살 피해자 103명과 함께 청와대에 진상 규명 촉구 청원을 냈다. 국방부는 그해 8월 자료 검토 결과 이들이 주장하는 학살 사실이 확인되지 않는다고 답했었다.

원고 측 이선경 변호사는 “어떤 나라든 전쟁 중 군인이 민간인을 학살하면 범죄이고, 배상을 하는 게 보편적 인권이자 단순한 진리”라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 책임을 부인하는 일본과 전쟁범죄를 끊임없이 사죄하는 독일 중 어느 길을 택할 것인지 기로 앞에서 대한민국의 국격을 높인 판결”이라고 말했다.

이형민 기자 gilels@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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