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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저귀 막 뗀 아이 영어유치원 과외… “목표는 의대” [이슈&탐사]

[욕망의 출발선, 영어유치원]


‘대치맘’ 40대 A씨는 딸이 유아대상 영어학원(영어유치원)에 다니던 1년 전까지 수업료와 과외비로 매월 300만원을 꼬박 지출했다. 딸이 영어유치원에 다니기 전부터 입학시험 격인 ‘레벨테스트’ 준비를 위한 과외교사를 구했고, 영어유치원에 다닐 때는 숙제를 도울 과외교습을 병행했다. A씨는 그 돈이 아깝지 않다고 했다. “다른 엄마들도 이렇게 한다”고 말했다.

A씨에게는 딸이 영어유치원에 합격한 순간의 기억이 훈장처럼 남아 있다. A씨의 딸은 만 3세 때 좁은 강의실에 앉아 처음 보는 교사 앞에서 25분간 레벨테스트를 치렀다. 알파벳의 빠진 철자를 적어넣었고, 고양이 그림 아래 적힌 ‘c○t’의 빈칸에 ‘a’를 채워 넣었다. 합격 통보를 받은 날, A씨는 딸이 첫발을 성공적으로 내디뎠다는 일종의 안도감을 느꼈다고 했다. 초등학생인 딸은 원어민처럼 영어를 발음한다. 딸이 수학과 국어 등 다른 과목도 잘 해내고, 의사가 될 것이라고 A씨는 믿고 있다.

30분에 15만원

영어유치원은 1990년대부터 서울 강남을 중심으로 하나둘 생겨났다. 국민일보는 2000년 10월 15일 보도를 통해 100% 영어로만 수업하는 고액 영어유치원이 부촌에 생겨나 인기를 끈다고 전했었다. 시간이 흘러 영어유치원은 현재 전국에 811곳이 됐다. 영어유치원을 단순히 일반유치원의 대안으로 인식하는 학부모는 드물다. 많은 학부모에게 영어유치원은 입시 경쟁의 첫 관문이다.

그간 영어유치원 가운데에는 원어민 교사와 유아가 어울려 다양한 활동을 하는 ‘놀이식’ 운영 방식을 택한 곳이 많았다. 하지만 수년 전부터 서울 강남의 ‘학습식’이 주목받기 시작했고, ‘놀이식’ 영어유치원들도 교재와 교육과정(커리큘럼)에서 ‘학습식’을 따르는 식으로 모습을 바꾸고 있다. 큰돈을 투자한 학부모들이 영어 실력 측면에서의 확실한 효과를 원했기 때문인데 그 결과는 주입식 교육이다.

학부모들이 영어유치원의 실력을 비교하는 분위기 속에서 영어유치원의 교육과정이나 레벨테스트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일부 유명 영어유치원에는 유아들의 레벨테스트를 기다리는 순번이 쌓이고, 또 다른 ‘영재테스트’ 상위 5%에게만 레벨테스트 자격을 주는 곳도 생겨났다. 유학생 출신으로 만 3~6세 유아를 과외교습하는 한 20대는 최근의 레벨테스트 수준을 두고 “내가 했더라도 떨어지지 않았을까 한다”고 말했다. 그가 가르친 한 유아는 영어 실력은 좋았지만 말하기 전 ‘어~’ 하며 잠시 숨을 고르는 버릇이 있었다. 그 유아는 “헤지테이션(망설임) 때문”이라는 설명과 함께 불합격 통보를 받았다.

‘합격’ 문턱이 높아지니 학부모들은 기저귀를 막 뗀 유아에게 개인과외를 붙인다. 영어유치원들의 레벨테스트가 10월에 몰려 있어 적잖은 만 3세 유아들은 여름부터 3~4개월간 영어 말하기와 쓰기를 집중적으로 배운다. 이 과외교습 시장도 학부모들 틈에 알음알음 알려진 유명 ‘공부방’들을 중심으로 질서가 형성돼 있다. 한 학부모는 “기저귀 찬 아이에게 ABCD를 가르치는 것인데 30분에 15만원을 받는 이도 있다”고 말했다. 학부모들은 힐난하면서도 ‘30분에 15만원’의 문을 두드린다.

영어유치원 유아들을 대상으로 과외교습을 하는 40대 김모씨는 “시험이 한 달 남은 시점에 ‘하루 두 번 와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경험도 있다”고 했다. 그는 “학부모가 하도 열성이라서 외국에 가실 것인지, 하버드대를 보내실 것인지, 아니면 서울대 의대 정도를 생각하시는지 먼저 물어본 적도 있다”고 말했다.

6개월 웨이팅, ‘0.1초컷’ 송금

학부모들은 자녀가 레벨테스트를 준비한 첫해에 영어유치원에 합격하면 ‘초시합격’이라며 서로 축하한다. 유난 떠는 일처럼 보이지만 사교육 세계에선 진지한 일이다. ‘사전 사교육’ 시장의 태도 역시 대학입시나 국가고시 학원들과 다르지 않다. 공부방들은 초시합격 사례가 얼마나 많은지, 어떤 유명 영어유치원에 몇살 아이를 얼마나 합격시켰는지를 알려 추가 수강생을 모집한다.

레벨테스트를 통과했다고 해서 곧장 영어유치원에 다닐 수 있는 건 아니다. 레벨테스트 문턱을 넘은 학부모들은 예매·접수 대행업체 여러 곳에 돈을 내 입학금 송금을 의뢰한다. 등록 시점에 맞춰 입학금을 0.1초라도 빨리 보내야 하기 때문인데, ‘성공보수’는 20만~30만원대다. 이 세계에도 학부모들이 “성공률이 높다”고 인정한 업체가 있다. 딸이 영어유치원 레벨테스트를 통과한 A씨도 이 ‘송금 전쟁’에 100만원 이상을 들였다고 했다.


국민일보 설문조사 결과 대개의 영어유치원 학부모들은 영어유치원에 월 150만원 안팎을 내고 있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 따르면 서울 지역 영어유치원의 학원비는 4년째 증가하고 있다. 그나마 피복비와 급식비, 체험활동비 등은 따로 계산해야 해 서울 강남의 경우 실질적으로는 월 300만원이 필요하다는 곳도 여러 곳이다.

정부와 시민단체의 집계로는 영어유치원 ‘파생 사교육’ 시장의 규모가 확인되지 않는다. 취재팀이 접한 학부모들은 ‘새끼과외’ ‘백업과외’ ‘숙제과외’ 등의 용어를 공통적으로 썼다. 이는 영어유치원 숙제를 돕거나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과외교습을 말한다. 하원한 아이들은 1시간가량 쉬었다가 이 과외교습자들과 다시 책상에 앉는다. 과외교습자들의 말에 따르면 이 ‘새끼과외’는 1시간 기준으로 대략 5만원 선에 시세가 형성돼 있는데, 20만원까지 받는 이도 있다고 한다.

끊임없는 비용에도 영어유치원은 여전히 수요가 공급을 압도하는 세계다.

영어 실력은 한국사회에서 크게 보상받게 된다는 믿음 속에서, 이 구조는 앞으로도 쉽게 변치 않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자녀가 3~4세 때 영어유치원을 보내지 않은 이들은 주변 상황에 놀란 뒤 5~6세 때 영어유치원의 문을 두드린다. 첫째를 보내지 않았으면 둘째라도 보내야 하나 고민한다. 영어유치원 상담직원 박모(43)씨는 “‘아차’ 싶어 영어유치원으로 옮겨오는 학부모가 많다”며 “영어유치원을 관두는 이들은 금전적인 이유일 뿐”이라고 말했다.

끝은 또 다른 시작

영어유치원 졸업은 사교육의 끝이 아니다. 초등학교 학부모들 앞에는 만족스럽던 영어유치원 교육을 이어갈 영어학원의 세계가 다시 넓게 펼쳐진다. 서울 강남 학부모들은 “아이가 만 6세가 되면 대치동 ‘빅3’ ‘빅5’로 불리는 초등학생 대상 영어학원 수강을 준비해야 한다”고 했다. 이들 학원의 입학시험은 난도가 높아서 ‘7세 고시’라고 불린다. 이 대목에서도 과외가 있고, 초시합격이 있고, 송금 전쟁이 있다. 학부모들은 잠재적 입시 경쟁을 의식해 두 살 터울의 자녀 학부모들과 교류한다. 동갑은 물론 한 살 터울도 피하는 이유는 “혹시 ‘재수’를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자녀가 영어유치원을 나온 학부모 다수는 자녀의 사립초나 국제학교 진학을 희망한다. 영어유치원별로 사립초나 국제학교 진학률이 장기간 추적 연구되진 않았다. 하지만 학부모들이 입을 모아 하나의 경로처럼 말하는 영어유치원은 있다. 서울의 한 국제학교 교사로 재직하는 B씨는 “16명 한 학급 전체가 특정 영어유치원 출신이다. 다른 유치원 출신은 보지 못했다”고 했다.

영어유치원이 다른 사교육과 차별화되는 이유는 영어의 한국사회 속 상징적 지위다. 변수용 미 펜실베이니아주립대 교육학·인구학·아시아학 교수는 “영어는 한국 사회의 엘리트들이 지녀야 하는 필수 요소이자 덕목이고, 영어만 잘하면 국제중·국제고·외고·명문대 등에 입학할 특전이 주어지며, 좋은 회사에 취직할 수 있도록 사회적 보상 시스템이 제도화돼 있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교사이자 ‘압구정에는 다 계획이 있다’의 저자인 임여정씨는 “서울대 ‘과잠’(학과 점퍼)을 보고 부러워하듯 특정 영어유치원 가방을 메는 것을 보고 부러워한다”며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사교육이 더 과열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슈&탐사팀 이경원 이택현 정진영 박장군 기자 neosar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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